도
道
“하나의 물건도 집어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놓아라.”
“아무것도 집어들 수 없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그럼 가져가거라.”
12세기 중국 선종(禪宗) 불교의 승려가 말한 공안(公案), 즉 화두다. 얼핏 들으면 멋진 이야기인 듯도 싶지만 그런 방면에 감수성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저 재치 있는 유머 정도일 수도 있다.
화두는 원래 선종 불교에서 자주 쓰는데, 사실 동양 사상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딱히 불교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말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道德經)』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말도 일종의 화두다.
『도덕경』은 중국 춘추시대에 노자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노자의 실존 여부도 확실치 않고 고대의 고전이 흔히 그렇듯이 한 개인의 창작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도덕경』은 노자가 주나라의 패망을 예감하고 떠날 때 자신을 추앙하던 어느 지방 관리의 요청을 받고 단 5천 자 분량으로 도의 개념을 정리해준 책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화두나 선문답 따위는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왜 영원한 도가 아닐까?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왜 영원한 이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란 무슨 특별한 재능을 가졌거나 수양을 거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비밀스런 교의라도 된단 말일까? 대체 그런 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선문답이나 화두는 멋있어 보이지만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해석이 분분하게 마련이다(심지어 그 해석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많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무수한 주석이 주렁주렁 달리는 이유는 성서의 내용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은 말 그대로의 뜻일까, 아니면 어떤 사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걸까? 하지만 예수의 기적보다 화두가 더 위험한 이유는 종교처럼 노골적이지 않지만 때때로 사기성도 있기 때문이다. 화두는 속으로는 추상적이면서도 겉으로는 구체적인 앎이나 깨달음을 담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쉽다.
화두를 읽고 대번에 깨달음을 얻은 듯 여기는 태도는 대부분 화두를 장식하는 역설적인 표현의 매력에 속아 넘어간 탓이다. 모든 역설은 정설이 있기에 존재한다. 도는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름은 ‘일단’ 부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써야 더 정확해진다.
“말할 수 있는 도도 있지만 영원한 도는 굳이 말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를 수 있는 이름도 물론 좋은 이름이지만 진짜 영원한 이름은 부를 수 있고 없고와 무관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재미가 없고 멋이 부족하므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결국 말장난이 주는 재미와 멋에 불과한 걸까?
말과 무관한 깨달음이란 없으며, 개인과 개인 사이에 텔레파시나 불립문자(不立文字) 같은 것도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처럼 자기 안의 확실성(“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더 솔직한 인식의 출발점이다.
진지한 자세로 바라보면 도의 가르침은 실상 신비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도는 그냥 ‘묻지 마!’가 아니다. 도의 근원은 ‘어둠’이고, 어둠은 곧 ‘신비의 문’이다. 진실하고 영원한 것은 어둠 속에 있을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는 모든 것을 신비 속에 파묻는 것과는 정반대로 신비 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한다.
세상 만물의 근원에는 도가 있다. 만물은 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인간은 욕심으로 그 도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도를 거스르고자 한다. 세상을 망치고 악행을 일삼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고치고 선행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역시 인위적인 욕심에 불과하다. 인위가 빚어낸 무질서와 혼란을 극복하려면 아무 욕심도 없고[無慾]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無爲],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성인(聖人)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즉 무위자연을 택한다. -『도덕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순전히 정적인 상황인 것만이 아니듯이 무위자연 역시 소극적이기만 한 개념은 아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말하지 않는 것, 즉 침묵과 어둠 속에 있다. 사람들은 소리와 빛은 보지만 침묵과 어둠은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안목과 인식을 갖추면 그때부터의 행위는 무위자연의 ‘적극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바로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을 쓸모있게 만드는 것은 그릇 속의 빈 곳[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도덕경(道德經)』 11장”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의 개념은 서양 철학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실재(presence)의 심층에 있는 부재(absence)의 의미를 강조하는 구조주의의 인식론이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어린 왕자』의 교훈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도는 해석자들이 지나치게 부풀리는 바람에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하는 반면, 구조주의와 『어린 왕자』는 그런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에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한다는 점일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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