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지속
Longue Durée
지구상의 전 지역이 알려졌고 자연을 거의 완전히 정복한 현대에는 문명이 지리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고 믿기 쉽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극지에도 도로를 낼 수 있고, 사막에도 도시를 건설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달에도 기지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지리적 요인이 문명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느린 탓에 인간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지리가 역사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가리켜 구조주의 역사가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역사라고 하면 흔히 역사적 사건들을 연상한다. 예를 들면 기원전 3세기에 진 시황제(秦 始皇帝, BC 259~210)가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중세 말기에 서유럽의 십자군이 이슬람 문명권을 침략했고, 18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는 식이다. 이런 사실들을 알면 역사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브로델의 견해는 다르다.
브로델은 복잡다단해 보이는 사건사의 아래에는 국면사(局面史)가 있고, 또 그 아래에는 구조사(構造史)가 있다고 말한다. 이 역사의 ‘3층 건물’은 층마다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되는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역사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표층인 사건사의 흐름은 단기지속으로 무척 빠르다. 그 아래 중기지속에 속하는 국면사의 층에서는 그보다 더 장기적이고 불변적인 요소, 개별 사건들이 아니라 경제, 국가, 사회, 문명, 인구 변동, 산업 발전 등의 원대한 주제들이 흐른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다.
맨 아래 심층에는 장기지속의 구조사가 자리 잡고 있다. 브로델의 말에 따르면 구조사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대단히 완만한 리듬을 가진 역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있는 역사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다. 사건사와 국면사가 인간 행위를 다루는 역사라면 구조사는 인간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연관된 역사다. 따라서 여기에는 인간의 시간 바깥에 있는 사물들, 즉 산과 들, 강과 바다의 역사도 포함된다.
전통적인 학문 분류에 따르면 구조사의 주제들은 역사학이라기보다는 지리학에 속한다. 하지만 브로델은 그것들을 다루지 않으면 역사를 올바로 서술할 수 없다고 본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지리는 언뜻 생각하면 늘 불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사물들’도 실은 서서히 변한다. 변하는 속도가 무척 느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 생물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장기지속의 구조는 역사를 가능케 하는 무대이자 역사를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 내내 지리적 환경은 문명의 성격을 결정했다. 지중해가 없었다면 그리스와 동부 지중해 일대에서는 화려한 해상 문명을 꽃피우지 못했을 테고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이라고 부른 로마제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중국 한복판에 중원이라는 지리적 중심지가 없었다면 중원에서부터 동심원적으로 퍼져나가는 대륙 문명이 성립되지 않았을 테고 몽골제국은 일찌감치 중화 문명권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특정한 에너지원이 매장된 곳(이를테면 중동), 특정한 질병이 지배하는 곳(이를테면 아프리카)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문명의 성격을 좌우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건사부터 서술하지만 브로델은 가장 근원적인 구조사부터 역사 서술을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역사의 층위에서부터 가장 피상적인 층위로, 가장 긴 호흡의 장기지속에서 가장 빠른 단기지속으로 향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고 상식이다. 그러나 기존의 역사가들은 그 상식을 무시했으며, 심지어 역사학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역사적 설명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언제나 장기적인 시간, 즉 구조다. 그것은 많은 사건들, 즉 자신의 흐름 속에 끌어넣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살육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우연의 역할을 제약한다.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
의식적 인간 활동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와, 무의식적 구조를 행위 주체로 내세우는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크게 다르다. 역사를 뜻하는 단어들, 즉 영어의 history, 프랑스어의 histoire, 독일어의 Geschichte는 모두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엇이든 지나고 나면 역사가 되듯이 역사는 그 자체로 별개의 학문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장기지속의 역사는 기존의 역사보다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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