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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건방진방랑자 2021. 7. 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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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장자가 문제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자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성심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존립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심은 된 자의식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지만,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도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의식에는 고착된 자의식과 아울러 임시적 자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결코 임시적 자의식과 관련된 성심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겠지만, 허심(虛心, 비인칭적인 마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장자에 따르면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成心]은 현재 내 삶이 깃들어 있는 새로운 삶의 문맥과의 충돌과 긴장을 통해서 나에게 드러난다. 즉 성심에 대한 경험은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에서 오는 부득이(不得己)의 느낌과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득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결국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 조우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이런 부득이의 경험은 기존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편안함[]의 좌절을 경험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새롭게 체험된 부득이의 경험은, 사실상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의 일치감[成心]을 전해야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탁월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자는 바로 이런 부득이의 경험에서 사변적 인식의 탄생을 엿보고 있다. 기존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이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로 인해 의식되는 지점, 즉 기존의 삶의 문맥과 도래한 삶의 문맥이 마주치는 그 경계선상에서, 그 부득이의 분위기 속에서 인식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식은 이런 부득이의 긴장을 내외 분리를 통해 미봉하려고 한다. 새롭게 도래한 삶의 문맥을 저것[, ] 혹은 외면으로, 이전의 삶의 문맥에서 이루어진 성심을 이것[] 혹은 내면으로 삼는 것과 동시적으로 인식은 탄생한다. 동시에 이렇게 인식의 탄생을 통해 성심은 내면으로, 혹은 고착된 자의식의 근거로 전환되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인식이 성심을 고착된 자의식의 근거로 전환시키고, 새로운 삶의 문맥을 외면으로 전환시킨다고 하여도, 우리의 삶은 이미 새로운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의 마음은 이미 새로운 삶과 소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득이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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