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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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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자가 권고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 그리고 그 결과로 달성되는 동의와 일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은 이미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소통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단지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사전에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독창적인 예술가들, 어린아이들, 환자들, 새들, 꽃들, 나아가 새로 태어날 인간들이 배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이라는 합의와 동의 절차가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합리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선이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타자 사이에 서로 합리성에 대한 내포와 외연이 다르다면,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소통 자체는 애초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한두 가지 생각해보자. 우선 한국어를 쓰는 내가 영어를 쓰는 미국으로 갔다고 해보자. 이럴 때 나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공통적인 행동양식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것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언어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워야만 한다. 외국에 나간 나이든 사람과 어린아이 중 왜 어린아이가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가? 그것은 자신의 모국에서 형성된 선이해, 혹은 이해 지평을 제거하는 데 어린아이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에 나갈 때 이미 형성된 선이해라는 지평이나 매개는 소통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수영을 배울 때, 수영 교본을 여러 권 숙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수영을 어린아이보다 잘 배울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영을 배울 때, 즉 물과 소통을 할 때, 수영 교본은 이 사람의 수영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오히려 물과의 소통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반면 어린아이는 직접 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물의 운동과 흐름에 맞추어 조절한다. 물과 소통한다는 것은 내가 물 속에서 수영한다는 것이지, 수영 교본이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최초의 수영 교본도 누군가가 물과 소통한 이후에 쓴 것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이런 무매개적이라는 성질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이름뿐인 소통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수영을 잘 한다고 해서 우리가 물과 합일되었거나 일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무매개적 소통은 나와 타자의 합일이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생성의 긍정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전제되어야 소통의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또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의 자기 동일성 혹은 선이해라는 매개의 지평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 무매개적 소통), 주체가 일종의 자기 해체를 통해 타자로 향하는 자기 조절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자기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외국어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항상 타자와의 무매개적 소통을 전제로 영위되는 법이고, 오직 이런 무매개적 소통을 통해서만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인식론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삶이 이루어지는 실존적 사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지금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는 전혀 예기치 못한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함으로써 전혀 예기치 못한 우리로 생성될 것이다. 결국 소통의 긍정은 공존과 공생의 긍정과 연결되고, 비움[]으로 상징되는 깨어남[]은 이런 본래적 존재 양식으로의 복귀라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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