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착된 자의식의 폭력성
이제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노나라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인 것처럼 응접하였다.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었고, 음악도 들려주면서 그는 극진하게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그 새에게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발제 원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노나라 임금이 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새라는 타자를 자기의 고착된 자의식 또는 내면에 근거한 외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그 새는 죽고, 그도 다시는 그 새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새라는 타자와 관계 맺은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경우 새는 타자라고까지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새는 새 자체로서의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투사된 외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노나라 임금이 새를 기른 방법에 대해서,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以鳥養養鳥]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는 것[以已養養鳥]이라고 논평하고 있다. 여기서 새를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기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새와 소통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소통을 통해서 새로 상징되는 타자와 어울리는 새로운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역으로 만약 이 노나라 임금이 자신의 백성들을 기를 때,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나라 임금이 새를 만나기 이전에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 자체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삶의 문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런 문맥에 근거해서 구성된 마음[成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약 그가 사람들을 새를 기르는 방법[以已養養鳥]으로 길렀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새가 도래했을 때만이다. 이 순간에 그는, 새를 타자성에 근거한 타자로 조우하지 않고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다. 그래서 노나라 임금이 새를 기른 것에 대해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己養]이라고 한 장자의 논평은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사태에 대한 비유적 비판에 해당한다. 여기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己養]은 성심이 전화한 내면을, 이렇게 길러지는 새는 외면을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타자성에 근거한 타자와 외면으로 관조되는 타자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식과 갈등에 빠져 있는 어느 어머니를 생각해보자. 이전에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의 아들은 요새 방과 후 집에서 공부를 하기보다는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자 그녀는 아들에게 말한다. “애야!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꾸나. 요새 무슨 고민이 있니?” 아들은 다음과 같이 진정으로 대답한다 “예. 저 공부해서 대학가기보다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서 대부분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이 놈이 공부를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걸 거야”라고 판단했다고 하자. 결국 그녀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깊어만 갈 것이다. 이 갈등의 원인은 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판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서 음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려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일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 타자와의 공생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해 타자성에 근거해서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주체가 그 타자를 삶의 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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