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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도는 실천적 진리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도는 실천적 진리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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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철학에서 도()의 의미

 

 

1. 도는 실천적 진리

 

 

성급한 연구자들은 장자가 언어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장자를 노자와 동일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1을 보면,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필(王弼)과 같은 역대의 주석가들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이들에 따르면 도는 초월적이며 일원적인 통일된 실체이자 현상적 세계의 모든 개별자들의 발생 이유이자 존재 근거다.

 

따라서 분리 작용과 구별 작용을 하는 인위적인 언어나 사유로는 결코 도에 대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필은 도와 개별자들 사이의 관계를 일원적인 나무의 뿌리와 다원적인 나무의 가지들이라는 유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가지들에는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가지들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뿌리에 대해 이름을 붙이면 그 뿌리가 마치 하나의 가지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先秦) 철학사에서 도는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간단히 도라는 글자의 발생과 의미 변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도라는 글자의 기원이 될 만한 어떤 문자도 상()갑골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에 도라는 문자는 길, 기술(art), 이끌다, 말하다 등을 의미했었다. (way)이라는 의미로 쓰인 도는 몇몇 청동 명문(銘文)들에서 확인될 수 있다. 기술(art)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도의 초기 용례는 시경(詩經)대아(大雅) 생민(生民)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후직의 농업은 경계 짓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誕后稷之穡, 有相之道].” 이끌다라는 의미로 쓰인 도라는 문자는 기원전 1000년이 지날 무렵 청동으로 되어 있는 우정(禹鼎)’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나중에 이 글자는 촌()자가 덧붙여져서 도()로 쓰인다. 말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도의 용례는 시경(詩經)용풍(鄘風) 장유자(牆有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전 왕들의 방법이나 이념을 의미하는 선왕지도(先王之道)와 같은 (추상적인) 방법이나 이념이란 의미로 쓰인 도는 서주 청동기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시경에 나오는 가능한 사례들도 (구체적인) 길을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고, 상서(尙書)』 「주서(周書)에서도 도는 전적으로 말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도라는 개념이 추상적으로 세계의 근거나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게 된 것은 선진 사상계에서도 매우 늦은 시기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론적이고 실체론적으로 이해된 도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직접 도라는 말이 선진 철학사에서 어떤 의미와 맥락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시작은 중국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논어』 「이인(里仁)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아침에 도에 대해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있다. ‘왜 공자는 아침에 도에 대해 들었는데, 바로 죽을 정도로 좋다고 하지 않고 저녁까지 기다리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들으려고 했던 도가 사변적이거나 이론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가 추구했던 진리가 ‘1+1=2’와 같은 산술적 진리라면, 공자는 이 진리를 듣는 순간 바로 죽어도 좋다고 술회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 사이는 무엇을 함축하는가? 이 거리는 단순히 시간적인 거리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 거리는 바로 실천과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침에 그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 비록 !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라고 깨우쳤다고 할지라도, 그런 깨우침을 실천했을 때에만 실천적 진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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