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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 3. 백악시단이 주창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본문

연재/배움과 삶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 3. 백악시단이 주창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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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악시단이 주창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김창협(金昌協)농암집(農巖集)34 잡지 외편(雜識 外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는 우리 조선의 시가 선조(宣祖) 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시도(詩道)가 쇠한 것이 실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선조 이전에는 시를 짓는 이들이 대체로 다 송() 나라의 시를 배웠기 때문에 격조가 대부분 전아하지 못하였으며 음률도 간혹 조화롭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또한 질박하고 진실하며 중후하고 노련하면서도 힘이 있었기에 겉치장을 하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각자 일가(一家)의 언()을 이루었다.

世稱本朝詩, 莫盛於穆廟之世.’ 余謂詩道之衰, 實自此始. 蓋穆廟以前, 爲詩者, 大抵皆學宋, 故格調多不雅馴, 音律或未諧適. 而要亦疎鹵質實, 沈厚老健, 不爲塗澤艶冶, 而各自成其爲一家言.

 

선조 때에 와서 문사(文士)가 많이 나오고 당나라의 글을 배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으며 중국의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의 시도 차츰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비로소 모방하여 단련하고 정교하게 가공하게 되었으니 그 이후로는 문사들이 따르는 작법이 한결같고 음조가 서로 비슷해져서 천질(天質)이 더 이상 보존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선조 이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선조 이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좀처럼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시도(詩道)의 성쇠가 나뉘는 지점이다.

至穆廟之世, 文士蔚興, 學唐者寢多. 中朝王李之詩, 又稍稍東來, 人始希慕倣效, 鍛鍊精工. 自是以後, 軌轍如一, 音調相似, 而天質不復存矣. 是以讀穆廟以前詩, 則其人猶可見; 而讀穆廟以後詩, 其人殆不可見, 此詩道盛衰之辨也.

 

 

김창흡(金昌翕)삼연집(三淵集)23 하산집서(何山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동방의 시는 연원이 얕아 논할 만한 헌장(憲章)이 없는데 유독 기휘(忌諱)에 상세하고 잉습(仍襲)을 탐하여 실로 300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 이전에는 교졸(巧出)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각자 그 진태(眞態)’ 드러내었는데 그 이후로는 점차 아름답고 우아한 데로 나아갔으니 다듬고 꾸미는 일이 날로 승하여 기휘는 더욱 상세해지고 잉습은 더욱 익숙해져 옛날처럼 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법에 구속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물을 명명하려면 반드시 휘부(彙部)에 의지하고 전고를 인용하려면 내력이 있기를 구하니 점점 좁아지는 틀 속에서 감히 곁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진기(眞機)와 활용(活用)을 묶어 행해지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또 중류(中流)를 끊고 율벌(津筏) 넘어 오르는 자가 있겠는가?

我東爲詩淵源旣淺, 無復憲章之可論, 而獨其詳於忌諱, 狃於仍襲, 實爲三百年痼弊. 然而宣廟以前, 雖有巧拙, 猶爲各呈其眞態, 以後漸就都雅, 則磨礱粉澤之日勝, 而忌諱愈詳, 仍襲愈熟, 非古之爲法而終爲法拘也. 故命物之, 必依彙部; 使事之, 要有來歷, 蹙蹙圈套之中, 不敢傍走一步. 遂使眞機活用, 括而不行, 豈復有截斷中流, 超津筏而上者乎?

 

종합하여 논하자면 백가(百家)가 한 가지 격이었으니 곧 한 사람의 작품에 경사(境事)가 뇌동(雷同)하고 정치(情致)가 뒤섞여 또 천편일률이 되었으니 구별할 수가 없다. ! 공자는 시로써 살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처럼 되려 하는가? 내가 우리 시에서 병통으로 여기는 것은 이처럼 법에 얽매이는 것이다.

蓋合而論之, 百家一格, 卽夫一人之作, 而境事雷同, 情致混倂. 又是千篇一律, 無可揀別矣. ! 詩可以觀. 豈欲其如是哉? 余於靑丘之詩, 所病其拘於法者如此.

 

 

이하곤(李夏坤)두타초(頭陀草)16 홍창랑시집(洪滄浪詩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또 비장(悲壯)’정려(整麗)’로써 저들[이안눌과 권필-필자]의 폐단을 교정하였으나 요란하고 어수선하며 정()과 경()이 참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황된 폐단을 노정하였다. 이에 김삼연(金三淵)과 홍창랑(洪滄浪)의 시가 나오게 되었다.

東溟又以悲壯整麗齋之, 然叫呶紛拏, 情境不眞, 故其弊也虗, 於是乎金三淵洪滄浪之詩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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