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①
① 명나라 전후칠자(前後七子)【전칠자(前七子):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서정경(徐積卿), 변공(貢),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 / 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의 복고론
이몽양(李夢陽, 1472-1529)은 홀로 전대의 위약(萎弱)함을 비판하고, “문장은 반드시 진한(秦漢)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盛唐)의 것이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이것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았다[夢陽獨護其萎, 倡言文必奏漢, 詩必盛唐, 非是者弗道. -『명사(明史)』 권286 「이몽양전(李夢陽傳)」].
이반룡(李攀龍, 1514-1570)은 마침내 후칠자의 영수가 되었는데, 그의 지론은 “문장은 전한(前漢), 시는 천보(天寶, 742~756)【천보(天寶): 당(唐) 현종(玄宗)의 세 번째 연호, 당나라 현종은 집권 초기에는 ‘개원(開元)의 치(治)’라 불리는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천보(天寶) 연호를 사용하던 집권 후기에는 양귀비(楊貴妃)의 일족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선정(善政)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초래했다. 이반룡이 천보를 언급한 것은 성당(盛唐)의 시를 배워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후로는 족히 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攀龍遂為之, 其持論謂: “文自西京, 詩自天寶而下,俱無足觀.” 『명사(明史)』 권286 「이반룡전(李攀龍傳)」].
② 명대 복고파 이론의 영향력
1) 17세기 조선의 정두경(鄭斗卿, 1597-1673)
정두경(鄭斗卿)은 『동명시설(東溟詩說)』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진(先秦)과 전한(前漢)의 산문은 읽지 앓을 수 없다. 시 또한 바른 것을 종(宗)으로 삼아서 마땅히 시경(詩經) 삼백 편을 종주(宗主)로 삼아야 한다. 고시(古詩)와 악부(樂府)는 한위(漢魏)시대 작품보다 나은 것이 없다. 조식(曺植), 유정(劉楨), 포조(鮑照), 사조(謝朓) 등 여러 명가와 도연명(陶淵明), 위응물(韋應物) 등은 충담(沖澹)하고 심수(深粹)함이 자연스러운 데서 나왔으니 찾아서 늘 읽어야 한다. 율시(律詩)는 정해진 형식에 구애되는 면이 있어 진실로 고체시의 고원함보다 못하다.
先秦西漢文, 不可不讀. 而詩又以正爲宗, 當以三百篇爲宗主, 而古詩樂府無出漢魏. 曹·劉·鮑·謝諸名家晉陶靖節·韋右司, 沖澹深粹出於自然, 可以尋常. 律詩於定體, 固不若古體之高遠.
그러나 대우(對偶)와 음률(音律) 또한 문사의 정밀한 것이니 마땅히 성당(盛唐)의 여러 작가를 법으로 삼아야 한다. 송(宋)나라의 시편들은 비록 대가들이 많지만 시의 정종(正宗)이 아니므로 꼭 배울 필요는 없다. 시를 처음 배우는 자가 송시를 익숙히 학습하여 그 풍에 젖어들게 되면 체제와 격조가 점점 낮아지게 된다. 우리가 비록 후세에 태어났지만 옛 것을 배우면 높아질 수 있으니 꼭 낮은 수준에서 기어 다닐 필요는 없다.
然對偶音律, 亦文辭之精者, 當以盛唐諸子爲法. 趙宋諸詩, 雖多大家, 非詩正宗, 不必學也, 初學之士熟習浸淫, 則體格漸墮. 人雖生晩, 學古則高, 不必圖於下乘.
2) 18세기에도 문단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 1666-1728)
오규 소라이는 『조래집(徂徠集)』의 「근세유가문집집성(近世儒家文集集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당인의 시를 배우고자 하면, 당시의 언어를 분류하여 뽑아두는 것이 편하며, 『문선』의 시를 배우고자 하면, 『문선』의 시어를 분류하여 뽑아두는 것이 편하다. 각기 상자 속에 담아두고 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 한 마디를 지으려 하면, 그 상자들 중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그만이지 다시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故欲學唐人詩, 便當以唐詩語, 分類抄出, 欲學選詩, 便當以選詩語, 分類抄出, 各別貯篋中, 不得混雜, 欲作一語, 取諸其篋中, 無則已, 不得更向他處搜究.
이와 같이 하기를 오래하면, 자연스럽게 그 언어들을 닮게 될 것이다. 송원(宋元)의 시와 명의 원중랑(袁中郞, 袁宏道)ㆍ서문장(徐文長, 徐渭)ㆍ종백경(鍾伯敬, 鍾惺) 등과 같은 이들은 삼가 한마디 말도 배워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시를 배우는 첫 번째 요법이다. 다만 당시는 조금 어려워 마땅히 명의 이반룡과 왕세정 등 칠재자(七才子)의 시로 보충해야 할 것이니, 이들은 당시의 정맥이다.
如此日久. 自然相似. 如其宋元及明袁中郎ㆍ徐文長ㆍ鐘伯敬諸家, 愼莫學其一語片言, 此學詩第一要法. 但唐詩苦少, 當補以明李于鱗ㆍ王元美等七才子詩, 此自唐詩正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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