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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 2.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② 본문

연재/배움과 삶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 2.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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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

 

 

3) 명말청초 공안파(公安派)의 명대 복고파 비판

원굉도(袁宏道)해탈집(解脫集)4 척독(尺牘)구장유(丘長孺)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물()은 참되면 귀합니다. 참되면 내 얼굴이 그대의 얼굴과 같을 수 없으니 하물며 고인의 모습이겠습니까? ()에는 당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문선(文選)의 체()일 필요는 없습니다.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중당(中唐)ㆍ만당(晩唐)에는 각자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초당, 성당일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大抵物眞則貴, 貴則我面不能同君面, 而況古人之面貌乎? 唐自有詩也, 不必選體也; 晚自有詩也, 不必初盛也; , 下迨元, 各自有詩也. 不必李杜也. (中略)

 

그런데 오늘날 군자들은 천하를 눌러 당시 일색으로 만들고자 하여 당시와 다르다는 이유로 송시를 흠잡습니다. 당시와 다르다고 송시를 흠잡는다면 어찌 문선의 시와 다르다고 당시를 흠잡지 않으며, 한위의 시와 다르다고 문선(文選)의 시를 흠잡지 않으며, 시경(詩經)의 시와 다르다고 한나라 시를 흠잡지 않으며, 원시 문자와 다르다고 시경(詩經)의 시를 흠잡지 않는단 말입니까? (중략)

今之君子, 乃欲概天下而唐之, 又且以不唐病宋. 夫槪以不唐病宋矣, 何不以不病唐, 不漢魏病, 三百篇病漢, 不結繩鳥跡病三百篇? (中略)

 

시의 기이하고 교묘하며 공교로운 것은 끝이 없기 때문에 옛날에도 다하지 못한 정이 있고, 지금도 그리지 않은 경치가 없습니다. 그런 즉 옛날이라고 어찌 꼭 높다 하며, 지금이라고 어찌 꼭 낮다 하겠습니까?

詩之奇之妙之工之無所不極, 一代盛一代, 故古有不盡之情, 今無不寫之景, 然則古何必高, 今何必卑哉?

 

 

또한 원굉도(袁宏道)금범집(錦帆集)2 문소수시(紋小修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시문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혹 지금 여염의 부인이나 어린애들이 부르는 벽파옥(劈破玉)이나 타초간(打草竿)의 부류이다. 이것들은 오히려 견문도 없고 지식도 없는 진인(眞人)’이 지은 것으로 진성(眞聲)’이 많아서 한위(漢魏)효빈(效顰)하지 않고 성당(盛唐)학보(學步)하지 않고서 본성에 내맡겨 발하여[任性而發] 도리어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기호정욕(嗜好情欲)에 통하니, 이것은 즐길 만하다. (中略)

故吾謂今之詩文不傳矣,. 其萬一傳者 或今閭閻婦人孺子所唱劈破玉打草竿之類. 猶是無聞無識眞人所作, 故多眞聲, 不效顰於漢魏, 不學步於盛唐, 任性而發, 尚能通於人之喜怒哀樂, 嗜好情欲, 是可喜也. (중략)

 

대개 감정이 지극한 말은 저절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진시(眞詩)’로서 전할 만하다. 그런데 혹자는 오히려 너무 노골적임을 병통으로 여기는데, 감정이 경우에 따라 변하며 글자가 쫓아가면서 감정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까 염려될 따름이지 무슨 노골적인 병통이 있겠는가? (中略)

大概情至之語自能感人, 是謂其詩可傳也. 而或者猶以太露病之, 曾不知情隨境變, 字逐情生, 但恐不達, 何露之有? (中略)

 

이른바 원망하되 상하지 않는다[怨而不傷]’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지극한 시름을 겪을 때에는 통곡하여 눈물을 흘리고 거꾸러지고 뒤집고 하여 음을 선택할 겨를이 없거늘, 원망한다고 할 때 어찌 애상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安在所謂怨而不傷者乎? 窮愁之時, 痛哭流涕, 顛倒反覆, 不暇擇音, 怨矣, 寧有不傷者?

 

 

원굉도가 제시한 진시(眞詩)’는 곧 작가 흉중의 도저한 감정인간의 본능적 욕망까지를 포괄한들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극하게 풀어낸 것이다.

 

 

4) 조선후기 백악시단(白嶽詩壇)의 명대 복고파 비판

김창협(金昌協), 농암집(農巖集)34 잡지 외편(雜識 外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헌길(獻吉) 이몽양(李夢陽)은 사람들에게 당나라 이후의 글을 읽지 말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실로 너무나 편협하고 비루한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법을 배운다는 측면에서 말하였으니 괜찮다. 이우린(李于麟=李攀龍)의 무리는 시를 지을 때 전고를 사용함에 있어 당나라 이후의 말은 쓰지 말도록 금지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소롭다. 시를 짓는 데 중요한 것은 성정을 풀어내고 사물을 다 포괄하는 데 있으니 생각과 느낌이 닿는 것마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의 정조(精粗)와 말의 아속(雅俗)도 가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고금을 구별한단 말인가.

獻吉勸人不讀唐以後書, 固甚狹陋. 然此猶以師法言可也. 至李于鱗輩, 作詩使事, 禁不用唐以後語, 則此大可笑. 夫詩之作, 貴在抒寫性情, 牢籠事物, 隨所感觸, 無乎不可. 事之精粗, 言之雅俗, 猶不當揀擇, 況於古今之別乎?

 

이우린의 무리는 옛것을 배움에 있어 애당초 신묘한 해오(解悟)가 없이 그저 언어를 본뜰 뿐이었다. 그래서 당나라의 시를 배우려고 하면 당나라 사람의 시어를 사용해야 하고 한나라의 문장을 배우려고 하면 한 나라 사람의 문자를 사용해야 했으니, 만약 당나라 이후의 전고를 사용한다면 그말이 당나라의 시어와 같지 않다고 의심했다. 그 때문에 서로 이처럼 경계하고 금지한 것이니, 이들에게 어찌 진정한 문장이 있겠는가!

于鱗輩學古 初無神解妙悟, 而徒以言語摸擬, 故欲學唐詩, 須用唐人語; 欲學漢文, 須用漢人字. 若用唐以後事, 則疑其語之不似唐, 故相與戒禁如此, 此豈復有眞文章哉!

 

 

김창흡(金昌翕)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25 정관재선생언행록(靜觀齋先生言行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홍만선이 그 부친(洪柱國)의 북평사 전별연에서 돌아와 조정에 가득한 공경의 수십 편 시를 일일이 낭송하였는데 선생께서 그 강기(强記)함을 대단히 칭찬하였다. 동명(東溟)되놈 땅 뭇 산들이 북극에서 내려와, 장백산에 맺혔으니 장백산의 기세 우뚝하고 우뚝해라라고 한 시구를 듣더니 선생께서 비웃으시며 늘 이렇게 웅대한 말만 짓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洪萬選來自其大人北評事餞席, 歷誦滿朝公卿詩章幾數十篇, 先生極稱其強記. 聽至東溟 胡地群山北極來, 結爲長白勢崔巍.’ 先生哂之曰: “每作此雄大語.”

 

 

김창협(金昌協)농암집(農巖集)34 잡지 외편(雜誌 外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鄭斗卿-필자]는 재주와 기력이 실로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등 여러 공에 미치지 못한 데다 일찍이 세심히 독서하고 시도(詩道)를 깊이 탐구하여 깊은 사색 속에 스스로 터득하고 확충, 변화시켜 본 적이 없이 그저 한때의 의기(意氣)로 옛사람들의 허망한 것을 따랐을 뿐이다.

然其才具氣力, 實不及挹翠諸公. 又不曾細心讀書, 深究詩道, 沈潛自得, 充拓變化, 徒以一時意氣, 追逐前人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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