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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성격과 만당(晚唐)의 영향 - 1.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일반적 성격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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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성격과 만당(晚唐)의 영향 - 1.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일반적 성격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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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관심과 취향(趣向)의 소재다.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대표작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登臨暫隔路岐塵 높은 곳에 올라서 잠깐 동안 속세와 멀어지는가 싶더니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되씹어 보니 한이 더욱 새롭구나.
畫角聲中朝暮浪 아침 저녁 화각(畵角) 소리에 물결은 흘러만 가고
靑山影裏古今人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옛 사람도 있고 지금 사람도 있네
霜摧玉樹花無主 옥수(玉樹)에 서리 치니 꽃은 임자 없고
風暖金陵草自春 금릉(金陵) 땅 따뜻하니 풀은 혼자 봄이로다.
賴有謝家餘境在 사씨가(謝氏家)의 남은 경치 그대로 살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 오래도록 시객(詩客)으로 하여금 정신 상쾌하게 하네.

 

봄을 맞는 금릉(金陵) 땅의 서정을 사조(謝眺)로 대표되는 사씨일가(謝氏一家)의 여경(餘景)에다 접속시키고 있다.

 

최승우(崔承祐)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송진책선배부빈주막(送陳策先輩赴邠州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禰衡詞賦陸機文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의 문()으로
再捷名高已不群 두 번이나 급제하여 이름 이미 높았도다.
珠淚遠辭裴吏部 구슬 같은 눈물로 배리부(裵吏部)를 떠나와
玳筵今奉竇將軍 대연(玳筵)에서 오늘은 두장군(竇將軍)을 받들겠도다.
尊前有雪吟京洛 술독 앞에 눈 있을 땐 서울에서 시()를 읊었는데
馬上無山入塞雲 말에 올랐을 땐 산이 없어 변방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從此幕中聲價重 이로부터 막중(幕中)에는 명성이 무거울지니
紅蓮丹桂共芳芬 문무(文武)가 같이 만나 방향(芳香)을 함께 하리라.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 같은 문장(文章)의 솜씨로 두번씩이나 진책(陳策) 선배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칭송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치원(崔致遠)은 고병(高騈)에게 올려 바친 칠언기덕시(七言記德詩) 30수중 설영(雪詠)과 같은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五色毫編六出花 오색(五色)붓으로 눈을 그려
三冬吟徹四方誇 삼동(三冬)에 읊어대어 사방(四方)에 자랑했네.
始知絶句勝聯句 비로소 알겠거니 절구(絶句)가 연구(聯句)보다 더 나은 것을
從此芳名掩謝家 이로부터 꽃다운 이름 사씨가(謝氏家)를 무색케 하리라.

 

고병(高騈)의 시()를 추어 올리는 헌시(獻詩)에서조차도 그 기준이 사씨일가(謝氏一家)와 대비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또 그는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제 잠깐 일위(一尉)를 그만두고 삼편(三篇)으로 응시(應詩)하려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하기를 원했으며 또 은거하기를 꾀하여 홀로 산림(山林)에 의지하여 다시 옛글을 열람하였습니다. 날마다 시()를 익혔으므로 우눌(虞訥)의 꾸짖음에도 피하지 않았으며 몇년 동안이나 부()를 지었으므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업을 닦아, 탁마(琢磨)하여 그릇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 今者乍離一尉, 欲應三篇. 更願進修, 且謀退縮, 獨依林藪, 再閱丘墳. 課日攻詩, 虞訥之𧥮訶无避, 積年著賦, 陸機之哂笑何慙, 候其敦閱致功, 琢磨成器……

 

 

스스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개의치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육기(陸機)의 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육기(陸機)는 그의 문부(文賦)에서 여러가지 문학이론을 배합하고 있거니와 ()는 정()을 추구하여 무늬 놓인 비단처럼 정교해야 한다[詩緣情而綺靡].”로 요약되는 그의 지론은 정서와 심미적 성격을 함께 드러내 보인 문학론의 압권(壓卷)이다.

 

이로써 보면 기려(綺麗)한 육조시(六朝詩)가 나말여초의 시인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우리나라 한시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것이 당말(唐末)이기 때문에 당시의 풍상(風尙)만당(晚唐)을 받아들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육조(六朝)의 기려(綺麗)만당(晩唐)의 기미(綺靡)가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수사기교에 용공(用工)할 수 밖에 없는 습작과정의 입당(入唐) 유학생들이 육조(六朝)의 장식미에 쉽게 영합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초기의 습작 과정에서부터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배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이후의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대체로 그러하다또 시()를 숭상하는 경향에 있어서도 바로 전시기(前時期)의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시()의 내질(內質) 역시 만당(晩唐)과 그 이전의 당시(唐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두보(杜甫)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의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치력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시()에도 반영되고 있지만, 만당(晩唐)의 시인들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큰 뜻이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으며 분명한 것은 시를 짓는 즐거움 그것만이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당(晩唐)을 배운 당시의 시인들이 성당(盛唐)을 건너 뛰고 스스로 육조시(六朝詩)에 근접하고 있는 까닭을 여기서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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