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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김매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5. 경세가의 시편(김매순)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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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매순(金邁淳, 1776 정조1 ~1840 헌종6, 德叟, 臺山) 역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와 같이 대연문장(臺淵文章)’으로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세도가벌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으로 이어지는 가계만 보아도 그의 문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 자신이 경학과 문장이 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으로는 오직 우리 집안의 여러 조상이 그러하였을 뿐[經學文章合而爲一者, 惟吾家諸祖爲然. 答族姪士心]”이므로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를 입증해준다.

 

20세의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예문관(藝文館)ㆍ홍문관(弘文館)ㆍ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말년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ㆍ병조참판(兵曹參判)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에 종형인 김달순(金達淳)이 사약을 받게 되는 가화(家禍)를 입게 되자 향리에 물러나 20여년간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차라리 그가 학문과 문장에 전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할 것이다.

 

고문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그 역시 홍석주(洪奭周)와 비슷한 문학관을 피력했다. 훈고학(訓古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지양하고 정주학(程朱學)을 계승하고자 노력했으며,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여 실천적 학문을 주장했는가 하면,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와 모방문체(模倣文體)를 모두 배척했던 경위가 홍석주(洪奭周)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는 글을 짓는 요체로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에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간결함[]’이요, 둘째는 진실함[]’, 셋째는 바름[]’이라 했다. 도문합일(道文合一)을 주장하는 고문가(古文家)의 문장론(文章論)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장에서 특별히 지적되어야 할 것은 간요(簡要)’라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문장론은 그의 詩作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은 출계상득일절(出溪上得一絶), 함종도중(咸從道中)(이상 七絶), 야연린사 송윤경도 제홍 출재홍원(夜讌隣舍 送尹景道 濟弘 出宰洪原), 차이두신태승운(次李斗臣台升韻)(이상 七律), 동야영회(冬夜詠懷)(五古) 등이다. 이 중 함종도중(咸從道中)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磴道千回並磵斜 돌길은 구불구불 개울과 함께 빗겼는데
馬蹄磊落蹋崩沙 뚜벅뚜벅 말발자욱 모래톱을 허무네.
崖縫紫菊無人管 언덕 위 자주빛 국화 향내 맡는 이 없지만
自向寒天盡意花 찬 하늘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피었네.

 

실제로 그의 문장은 각박하리만큼 그 소리가 맑다. 그래서 이것이 도리어 흠으로 잡히기도 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曹兢燮)김매순(金邁淳)의 문장에 쇠기(衰氣)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하여 일부러 번다(繁多)하게 꾸미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인 함종도중(咸從道中)도 물론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평안도 함종현에서 지은 것이다. 안짝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들판길을 가는 모습을 그렸고, 바깥짝은 길 옆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피어있는 들국화의 소담한 모습을 그렸다. 보는 사람 하나 없어도 제 뜻대로 핀 들국화에는 은자의 초연한 모습이 겹쳐져 있기도 하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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