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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유득공)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6. 후사가와 죽지사(유득공)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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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惠風惠南, 泠齋泠庵古芸堂)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모두 우리나라의 역사에 귀 기울인 흔적을 유감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27세에 이미 그의 숙부 유금(柳琴)이 청() 문단에 내놓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그의 시작(詩作)이 수록되면서 시명(詩名)을 중국에까지 떨쳤으며,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연행(燕行)을 통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청조(淸朝)의 문물(文物)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시작(詩作) 중에서 중국(中國) 문사(文士)들로부터 개별적으로 품평(品評)받은 작품만도 이조원(李調元)으로부터 23,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16수 등 총 97수에 이른다. 특히 반정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재는 재주와 정이 넉넉하고 격률이 독보적이다. 이따금 웅장한 시어를 토로하는 데 등림회고에 이르면 더욱 걸작이 많아 기아(箕雅)속에 편입되더라도 반드시 대가로 추앙되리라.

泠齋, 才情富有, 格律獨高. 時露鯨魚碧海之觀, 至於登臨懷古, 尤多傑作, 在箕雅中, 定推大家. 箋註四家詩2 卷末

 

 

유득공(柳得恭)의 문학이 역사회고(歷史懷古)와 기행(紀行)에 크게 의지했음을 지적한 평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유득공(柳得恭)이 주로 활용했던 시적 소재가 바로 조선의 역사와 풍속, 사적, 인정이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실제로 1000여 수가 넘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작(佳作)으로 꼽히는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등이 이를 입증해준다. 아래에 죽지사(竹枝詞) 서경잡절(西京雜絶)을 보인다.

 

乙密臺西春日曛

을밀대 서쪽으로 봄날은 저무는데

嬋娟洞裏艸如裙

선연동의 우거진 풀 기생 치마 같구나.

可憐今日西游客

가련할손 오늘 여기 서북(西北)에서 노는 나그네,

又斷情膓蘇小墳

또 한번 소소(蘇小)의 무덤 앞에서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이 작품 역시 이덕무(李德懋)선연동(嬋娟洞)과 마찬가지로 기생들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선연동(嬋娟洞)에서 읊은 것이다. ()나라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소소(蘇小)의 연상을 통하여 기생들의 고혼(孤魂)을 젊은 시절의 뜨거운 가슴으로 위로하고 있다. ()보다는 정()을 앞세운 작품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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