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자 惠風ㆍ惠南, 호 泠齋ㆍ泠庵ㆍ古芸堂)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 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모두 우리나라의 역사에 귀 기울인 흔적을 유감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27세에 이미 그의 숙부 유금(柳琴)이 청(淸) 문단에 내놓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그의 시작(詩作)이 수록되면서 시명(詩名)을 중국에까지 떨쳤으며,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연행(燕行)을 통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청조(淸朝)의 문물(文物)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시작(詩作) 중에서 중국(中國) 문사(文士)들로부터 개별적으로 품평(品評)받은 작품만도 이조원(李調元)으로부터 23수,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16수 등 총 97수에 이른다. 특히 반정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재는 재주와 정이 넉넉하고 격률이 독보적이다. 이따금 웅장한 시어를 토로하는 데 등림회고에 이르면 더욱 걸작이 많아 『기아(箕雅)』 속에 편입되더라도 반드시 대가로 추앙되리라.
泠齋, 才情富有, 格律獨高. 時露鯨魚碧海之觀, 至於登臨懷古, 尤多傑作, 在箕雅中, 定推大家. 『箋註四家詩』 권2 卷末
유득공(柳得恭)의 문학이 역사회고(歷史懷古)와 기행(紀行)에 크게 의지했음을 지적한 평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유득공(柳得恭)이 주로 활용했던 시적 소재가 바로 조선의 역사와 풍속, 사적, 인정이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실제로 1000여 수가 넘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작(佳作)으로 꼽히는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 등이 이를 입증해준다. 아래에 죽지사(竹枝詞) 「서경잡절(西京雜絶)」을 보인다.
乙密臺西春日曛 | 을밀대 서쪽으로 봄날은 저무는데 |
嬋娟洞裏艸如裙 | 선연동의 우거진 풀 기생 치마 같구나. |
可憐今日西游客 | 가련할손 오늘 여기 서북(西北)에서 노는 나그네, |
又斷情膓蘇小墳 | 또 한번 소소(蘇小)의 무덤 앞에서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
이 작품 역시 이덕무(李德懋)의 「선연동(嬋娟洞)」과 마찬가지로 기생들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선연동(嬋娟洞)에서 읊은 것이다. 진(晉)나라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소소(蘇小)의 연상을 통하여 기생들의 고혼(孤魂)을 젊은 시절의 뜨거운 가슴으로 위로하고 있다. 사(辭)보다는 정(情)을 앞세운 작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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