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신위(申緯)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한시사,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신위(申緯)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3:02
728x90
반응형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준 또다른 국내의 문인으로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를 들 수 있다. 중국 시인의 경우에는 국내의 여느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시인들을 학시(學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택영(金澤榮)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는 소식을 스승으로 삼고 곁으론 서릉과 왕유와 육유의 사이에 출입하였다.

其詩, 蘇子膽爲師, 旁出入于徐陵王摩詰陸務觀之間

 

 

소식(蘇軾) 외에도 서릉(徐陵)ㆍ왕유(王維)ㆍ육유(陸游)의 영향을 받았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그의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정견(黃庭堅)ㆍ원호문(元好問)ㆍ왕사정(王士禎)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후사가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실은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오직 신위만이 직접적으로 이서구 여러 학자들의 자취를 접했고 시서화 삼절로 천하에 이름 났다[惟申公之生, 直接薑山諸家之踵, 以詩書畵三絶, 聞於天下.”라 한 진술에서 증명되거니와 후사가가 이때까지도 천시되던 회화에 두루 관심을 가지면서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를 주장했던 사실 자체가 신위(申緯)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일차적인 영향관계를 설정해도 좋을 듯싶다.

 

이광려(李匡呂)의 경우 앞서 든 이건창(李建昌)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참봉군(參奉君) 이광려(李匡呂)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택영(金澤榮)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또다른 곳에서 공은 시에 있어서 처음엔 성당을 배웠지만 후엔 고쳐 소동파를 배워 전에 지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公於詩, 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 悉棄前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신위(申緯)의 초기시는 모두 없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단 이광려(李匡呂)의 당시풍에 크게 경도되었던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위(申緯)는 젊은 시절에는 당풍(唐風)을 숭상하다가 김정희(金正喜) 및 옹방강과의 교유 이후 차츰 송풍(宋風)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위(申緯)유소입두(由蘇入杜)’소식(蘇軾)을 거쳐 두보(杜甫)에로 귀착한 것이 아니라, 소식(蘇軾)을 바탕으로 두보(杜甫)를 수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옹방강으로 대표되는 당시 청 시단의 유소입두(由蘇入社)’도 당()과 송()을 절충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