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준 또다른 국내의 문인으로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를 들 수 있다. 중국 시인의 경우에는 국내의 여느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시인들을 학시(學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택영(金澤榮)이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는 소식을 스승으로 삼고 곁으론 서릉과 왕유와 육유의 사이에 출입하였다.
其詩, 蘇子膽爲師, 旁出入于徐陵王摩詰陸務觀之間
소식(蘇軾) 외에도 서릉(徐陵)ㆍ왕유(王維)ㆍ육유(陸游)의 영향을 받았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그의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정견(黃庭堅)ㆍ원호문(元好問)ㆍ왕사정(王士禎)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후사가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실은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오직 신위만이 직접적으로 이서구 여러 학자들의 자취를 접했고 시서화 삼절로 천하에 이름 났다[惟申公之生, 直接薑山諸家之踵, 以詩書畵三絶, 聞於天下.”라 한 진술에서 증명되거니와 후사가가 이때까지도 천시되던 회화에 두루 관심을 가지면서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를 주장했던 사실 자체가 신위(申緯)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일차적인 영향관계를 설정해도 좋을 듯싶다.
이광려(李匡呂)의 경우 앞서 든 이건창(李建昌)의 ‘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참봉군(參奉君) 즉 이광려(李匡呂)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택영(金澤榮)이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또다른 곳에서 “공은 시에 있어서 처음엔 성당을 배웠지만 후엔 고쳐 소동파를 배워 전에 지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公於詩, 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 悉棄前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신위(申緯)의 초기시는 모두 없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단 이광려(李匡呂)의 당시풍에 크게 경도되었던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위(申緯)는 젊은 시절에는 당풍(唐風)을 숭상하다가 김정희(金正喜) 및 옹방강과의 교유 이후 차츰 송풍(宋風)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위(申緯)의 ‘유소입두(由蘇入杜)’도 소식(蘇軾)을 거쳐 두보(杜甫)에로 귀착한 것이 아니라, 소식(蘇軾)을 바탕으로 두보(杜甫)를 수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옹방강으로 대표되는 당시 청 시단의 ‘유소입두(由蘇入社)’도 당(唐)과 송(宋)을 절충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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