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지상에서 영원으로, 초인의 오디세이
1. 형벌은 인간을 길들일 수 있는가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에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악명 높은 독방이 등장한다. 오랜 감방생활에 지친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제임스 카비젤)는 이렇게 항변한다. “제 방에는 72519개의 돌이 있어요. 전 그걸 세 번이나 세어봤다고요!” 10년이 넘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젊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늙은 죄수 아베 파리아(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돌들에 각각의 이름은 지어줘 봤나?”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방에서 죄수들은 ‘자기 계몽’이 아니라 하염없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어떻게 하면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야수를 가두기 위해 고안된 동물원에서 동물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감시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탈출하곤 한다. 생명체를 가두어 길들이고 형벌로 단죄하는 모든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 그가 니체였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인간의 한계상황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빠삐용』에서 『쇼생크 탈출』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탈출이 이미 예견되어 있는 영화에서 관객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갇힌 사람의 죄보다 훨씬 무서운 ‘가두는 자들’의 공포를 본 것이 아닐까. 야수처럼 사나운 죄수가 우아한 에티켓을 갖춘 교양인으로 변모하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끈 적은 거의 없었다. 형벌은 결코 죄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것, 맹수를 조련하듯 인간을 교화하는 어떤 권력도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는 것. 우리를 매혹시킨 탈주범들의 이야기는 늘,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은 이 자유의 피비린 중독성을 이야기해왔다.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인간을 가두는 권력의 잔혹성에 대해서라면, 우리의 니체가 가장 할 말이 많지 않을까.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이라 불리는 저 정신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한 도구를 형벌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현실과 심리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진정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범죄자나 수형자 사이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며, 감옥이나 교도소는 이런 집게벌레 종족이 번식하지 좋은 온상이 아니다. (……) 형벌이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단련하며 냉혹하게 만든다. 형벌은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형벌은 소외감을 격화시킨다. 형벌은 저항력을 강화한다.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427쪽.
요컨대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인간을 효과적으로(?) 길들일 수도 없으며,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덜 위험하게 보이도록 연기할 수는 있지만, 자신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스스로의 야수성을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 도덕은, 법률은, 감옥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거대한 동물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관점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이렇듯 ‘갇힌 자’보다 더욱 악랄한 ‘가둔 자’들의 부당한 권력과 그 내면의 나약함을 흥미롭게 해부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보고 또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풍부한 사유의 보물 창고다. 아마도 그 이유는 『쇼생크 탈출』이 ‘선과 악’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모호성을 화두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쏜살같이 주인공의 ‘단죄’를 향해 질주하는 ‘법’의 광기를 냉정하게 보도한다. 검사는 단지 ‘무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의 유죄를 확정한다.
검사: 피고는 아내가 살해되던 날 아내와 다퉜습니다. 심하게 다퉜죠.
앤디: 들통 나서 잘 됐다며 숨기려고도 안 했어요.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검사: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앤디: 그럴 수 없다고 했죠.
(……)
검사: 싸운 후 아내는 어떻게 했나요?
앤디: 짐을 꾸렸어요. 그 애인이랑 살려고 말이죠. 애인은 스포츠 센터 골프강사였죠.
검사: 아내를 미행했습니까?
앤디: 먼저 몇 군데 술집에 들렀습니다. 그 남자 집으로 갔더니 없더군요. 차를 한 켠에 세우고 기다렸죠.
검사: 무슨 의도로요?
앤디: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웠고 술에 취해 있었죠. 그냥 겁만 주려고 했어요…….
검사: 두 사람이 돌아오자 따라가 살해한 거군요.
앤디: 아뇨. 술이 깨고 있었고, 마저 깨려고 집으로 차를 돌렸어요. 도중에 강에다 총을 버렸고요. 분명히 말씀드렸던 대로요.
검사: 다음날 그 집 파출부는 총에 맞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 아닙니까? 단지 제 생각입니까? 살인이 있기 전에 총을 버렸다? 편리한 착상이군요. 사실입니다. 경찰이 3일 동안 강을 조사했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피고인의 총과 피살자의 총 자국을 대조할 수 없었죠. 그것 또한 대단히 편리한 논리 아닌가요? 안 그런가요? (……) 현장에서는 피고지문이 묻은 술병과 탄알 타이어 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팔에 안긴 젊은 두 남녀가 죽었습니다.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크다고 해서 죽음을 선고할 수 있습니까? (……) 이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닙니다. 간통이 죽을죄는 아닙니다. 이것은 훨씬 더 잔인하고 냉혈적인 복수입니다. 한사람 앞에 4발씩 쏘았습니다. 6발을 쏜 게 아니라 8발을 쏘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총을 다 쏘고 난후 다시 장전하여 그들을 쏘았다는 겁니다. 남은 총알을 사랑하는 사람의 오른쪽 머리에요. 저는 피고 듀프레인에게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으로 각각의 희생자에 대해 한 번의 종신형씩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정말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녀와 정부를 살해했을까.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피고를 ‘죄인’으로 확정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한 인간에 대한 두 번의 종신형으로 저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권력인가. 한 인간을 두 번의 종신형에 처할 수 있는 권력의 막강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은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어디서 부여받은 것인가. 그들이 도덕이라 주장하는 것, 그들이 올바른 행위라 규정하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도덕은 과연 인간을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규율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도덕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권력이 아닌가.
그들은 존엄함과 덕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려할 때 그러지 말라고 제동을 거는 것, 그것을 두고 그들은 덕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태엽이 감긴 단조로운 시계와 같은 자들도 있다. 그들은 똑딱거린다. 이 똑딱임이 덕이라 불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 아, “덕”이란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가! 그들이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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