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자라지 않는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셉 캠벨
바야흐로 ‘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한국형 신조어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압축하는 핵심적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보아-문근영-김연아-원더걸스-소녀시대 등 성인을 압도하는 초특급 스타들로 이루어진 국민 여동생의 계보. 그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키덜트(Kidult)적 감수성이 묻어 있다. 또한 인생의 복잡다단한 통과의례를 10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기간 속성 코스로 끝내버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의 정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소녀 스타들 뿐 아니라 『아이 엠 샘』을 통해 단숨에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코타 패닝,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역을 통해 10대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엠마 왓슨 등도 이 ‘소녀 시대’의 문화적 트렌드가 단지 한국형 신드롬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0대에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다 경험해버린 듯한 이 소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루도 빠짐없이 ‘검색어 순위’에 랭크되곤 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될지라도, 영원히 자라지 않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아련한 노스탤지아는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수성이기도 하다. 이 ‘국민 여동생’에 대한 대중의 열광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라지 않는 소녀들’의 차이라면, 그의 애니메이션 속 소녀들은 ‘실제 인물’을 대변하거나 ‘대중적 스타’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징’을 품은 소녀들이라는 것이다. 몸은 10대 소녀지만 마음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급인 원령공주와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의 올망졸망한 자매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나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처럼 ‘구원의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공동체의 신화에 등장하는 원형적 인물들이다. 이 소녀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그림체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현대화된 신화적 모티브를 구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독 ‘소녀들’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자연과 인간의 관계, 신화와 인간의 네트워크에 가장 친밀하게 맞닿아 있는 존재들이 바로 소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가공할 살상 무기나 엄청난 자본 없이도, 이 스펙터클한 무한 미디어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거대한 인류학적 화두를 감당해낸다. 이 작고 여린 소녀들이 감당해온 엄청난 테마들은 바로 문명의 빛이 죽여 버린 어둠, 혹은 제국의 총칼이 훑고 지나간 야생의 지대, 그리고 자본의 미사일이 황폐화시킨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어처구니없는 귀여움과 비현실적인 조숙함이 공존하는 이 소녀들을 보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 신화와 현실의 경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물샐 틈 없이 구분하던 ‘합리적 이성’의 방패를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성인 관객들이 훨씬 많은 이유도, 어른들이 이 소녀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면 이 무한 경쟁에서 다만 살아남기 위해 더럽혀진 어른들의 남루한 삶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소녀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피터팬 콤플렉스’와는 사뭇 다르다. 피터팬 콤플렉스가 ‘나름 괜찮았던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향수에 가깝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자기애적’이라기보다 ‘자기를 애지중지하느라 돌보지 못한 타인’에 대한 사랑을 환기시킨다.
누군가가 아무도 몰래
작은 길에 나무 열매를 심고서
작은 싹이 돋아난다면
그것은 비밀의 암호
숲으로 가는 패스포트
멋진 모험이 시작됩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옛날부터 숲 속에 살고 있는
토토로 이웃집 토토로
어린 시절에만 찾아오는 신기한 만남
비 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흠뻑 젖은 토토로를 만난다면
당신의 우산을 빌려주세요
숲으로 가는 패스포트
마법의 문이 열립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달이 뜬 밤에 피리를 분답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만약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면
멋진 행복이 당신을 찾아옵니다
-『이웃집 토토로』 주제가.
나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그들끼리의 가상 인터뷰를 기획하고는 한다. 만약 언어의 장벽도 시간의 장벽도 공간의 장벽도 사라진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장 대화가 잘 통할 것만 같은 캐릭터가 바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아닐까. 숲의 날짐승과 길짐승, 나무와 풀잎 하나하나, 돌멩이와 벌레 하나하나까지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 하는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조셉 캠벨이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아메리칸 인디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동물들과 곤충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언외언(言外言)의 대화를 나누는 나우시카 vs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부르며 대화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 숲의 정령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떠받드는 기술과 자본의 엄청난 힘과 싸우는 원령공주 vs 문명화된 미국인들이 어떻게 대지와 하늘과 강과 바람을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2002, 155~156쪽.
우리가 오늘부터 함께 떠날 신화 여행은 현대 문명이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함께 몰아내버린, 우리 안의 가장 귀한 것들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 될 것 같다. 이 모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는 바로 센과 치히로,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조셉 캠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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