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바르트의 풍크툼: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격한 적 없는 다섯 살 어린이의 사진 속에서 그가 생각하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사진이 이끄는 사랑과 슬픔의 에너지로 사진에 대한 아름다운 철학적 에세이 『카메라 루시다』를 완성했다. 『카메라 루시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바르트의 유일한 여자, 어머니의 죽음에 바치는, 보낼 수 없는 편지였던 것 같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최고의 아이러니는 그가 어머니의 사진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위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적 사진을 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이 책에 어머니의 사진이 절대로 실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 사진을 재연할 수 없다. 그 사진은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은 자신과는 무관한 사진, ‘일상적인 것’을 표현한 수천 장의 사진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 사진은 결코 가시적인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키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이 사진은 시대, 의상, 촬영 효과 같은 스투디움 때문에 흥미를 끌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 사진에서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할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247쪽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사진은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어떤 존재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러나 바르트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보편성 혹은 객관성의 잣대로 사진을 재단하고야 말 것이다. 바르트는 이 피상적인 공감의 놀이를 거부한다. 어설프게 이해받느니 철저히 오해받는 쪽을 택한 것일까. 그는 어머니의 사진이 ‘재현될 수 없다’는 점, 논리적으로 소통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머니의 사진을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존재를 할퀴는 풍크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였던 사진을 발견했을 때, 바르트는 그 사진이 그의 전 존재를 규정하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에게 ‘사진’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한 불멸의 역작 『카메라 루시다』를 쓸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 초래한 삶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을 때의 아픔을, 그 풍크툼이 그려낸 영혼의 흉터를, 바르트는 이렇게 그려낸다. 돌아가시기 직전, 바르트의 노모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아들 바르트의 세세한 보살핌을 받는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고 한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강렬한 내적 법규였던 어머니를 나의 딸로 체험했다. (……)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내가, 바로 어머니의 병을 통해 나의 어머니를 낳은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쪽.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시작했던 사진 찾기의 경험이 결국 상실을 더욱 철저하게 재확인하는 경험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마치 ‘내 어머니를 내가 낳은 듯한’ 새로운 희열로 전이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사진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재확인하지만, 사진을 통해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을 생생한 홀로그램처럼 되살려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가 사진에서 그들을 다시 발견하고 다시 필연적으로 상실의 경험을 반복하는 패턴. 이것이야말로 ‘풍크툼’의 순간이다. 단지 ‘이 사진 참 잘 나왔네’라고 의례적으로 발언하는 ‘스투디움(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상징)’이 아니라, ‘사진 속에 있는 나’와 ‘사진 바깥에 있는 나’가 더 이상 ‘둘’이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의 치명적인 관통상. 그것이 바르트가 이야기한 풍크툼이다. 풍크툼은 대상에 대한 완벽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가녀린 이해와 사랑이 아닐까. 완전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불완전한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
타인에게는 별 의미 없는 데면데면한 가족사진이나 군대 간 애인의 사진이, 그의 사진이나마 닳고 닳아 찢어질 때까지 만져보며 그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풍크툼이 된다. 똑같은 사진이 누군가에게는, 아무와도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절실한 풍크툼이 될 수도 있고, 누구나 심상하게 지나쳐버리는 사진관 전시용 가족사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사진이 스투디움이자 풍크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경험했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엄청난 사건을 몰랐을 때는 영화 초입의 판문점 사진이 그저 일반적인 ‘스투디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그 슬픈 사진은 우리의 가슴에 저마다 판문점보다 더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버린, 뜨거운 불화살이 되었다.
『색 & 계』는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암살 대상)을 사랑해버린 여자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참혹한 죽음 직전에 비로소 아주 잠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보인 세계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계의 신비를 작가 장아이링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토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
-장 아이링, 김은신 역, 『색 & 계』, 랜덤하우스, 2008, 67쪽.
이 선생에게는 이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함과 동시에 ‘죽은 그녀를 여전히 사랑해야 할’ 형벌 같은 운명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쩌면 지독히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지음(知音)의 벗을 만났으므로. 이 세상 누구도 믿지 못했던 그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적어도 죽기 전에 만났으므로.
무엇이 죽어버린 것인지 언제나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 이미 죽어간 것을 잊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죽어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의 칼날 같은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하는 사람. 그가 롤랑 바르트였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죽어버린 것들, 아니 죽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삶과 죽음의 경계도, 자아와 타자의 경계도, 영화와 관객의 거리도, 미디어와 인간의 거리도, 그저 넘을 수 없는 장벽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