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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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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당신과 논쟁을 할 만큼 영리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런 건 좀…… 천박해요, 그렇잖아요?” 메이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 그것은 천박하게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보기에 그런 천박한사랑의 도피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나 벌이는 작태였던 것이다.

 

메이의 주요 의상과 장신구의 특징은 주로 순백색을 위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메이의 티없이 희고 고운 피부와 절제된 순백의 드레스, 시리도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진주목걸이, 뉴랜드가 그녀에게 매일 아침 선물하는(!) 희디흰 백합. 이 모든 것은 뉴욕 상류층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순수미장센이다. 온몸을 순결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무장한 듯한 메이의 빈틈없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그녀에게 악의라는 것이 있을까의심할 정도로 숨 막히게 압도적이다.

 

한편 엘렌은 붉은색을 위주로 한 정열적인 드레스와 열정을 상징하는 노란 장미로, 메이의 순백색 코디에 눈이 먼 아처의 눈을 어지럽힌다. 메이가 언제든 나의 순수를 위협하는 그 어떤 타자라도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극도의 방어적 캐릭터를 순백의 코디네이션으로 은폐하는 반면, 엘렌은 의상 자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뉴랜드는 그녀들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노란 장미를 발견해냈다. 노을빛을 닮은 샛노란 장미는 이제껏 처음이었다. 처음엔 백합 대신 메이에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아름다움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정열, 그것이 바로 엘렌만이 가진, 뉴욕의 귀족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관능적 아름다움이었다. 절제와 품위, 금욕과 순결을 숭배하는 밍고트 가문의 집단적 아비투스와는 아울리지 않는.

 

아직 엘렌은 자신이 처한 곤경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뉴욕은 그녀의 고향이었기에 엘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그들의 커뮤니티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어두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뉴랜드는 그녀가 이혼 때문에 얻을 엄청난 불이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노예처럼 가둬 사육하는 잔인한 남편을 피해 고향으로 달아났지만, 뉴랜드가 보기에 고향만큼 위험한 곳은 없었다. 그녀의 이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온갖 추문의 굴레를 씌워 협박할 사람들도 고향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엘렌은 해맑은 얼굴로 말한다. “이젠 모두 털어버리고 완전한 미국인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그러나 뉴랜드는 알고 있다. 미국인, 게다가 뉴욕의 귀족이 되는 일은 돌아온 탕아엘렌에게 너무 어려운 도전임을. 아처는 그 모든 재산과 유럽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왜 이혼을 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엘렌은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대답한다. “자유를 얻잖아요.” 뉴랜드는 왠지 그녀가 말하는 자유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관능의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고고한 귀족가문의 규수들만을 상대했던 뉴랜드에게 엘렌은 숨길 수 없는 이국적 매혹으로 다가온 것이다. 엘렌이 원하는 자유는 뉴랜드가 즐겨보는 머나먼 나라 일본의 판화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방의 세계처럼 불가해한 판타지였다.

 

아직 엘렌은 알지 못한다. 그토록 심플한 자유를 얻기 위해 그녀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정의롭고 낭만적이며 보기 드물게 여성친화적인 뉴랜드 아처는 그녀를 돕고 싶다. 그러나 그 또한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물들어 있는 뉴욕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오랜 시간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만들어낸 암묵적 규약이며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을 넘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육체에 각인된 것임을. 아비투스는 개인이 그 메카니즘을 인식하지 못할 때 더욱 선명하게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가 매순간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소비의 선택조차도 우리를 조각해온 집단적 아비투스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인과 집단을 둘러싸고 있는 집, 가구, 그림, , 자동차, , 담배, 향수, 옷 등과 같은 특성들 전체와 스포츠, 게임, 문화적 여가활동 등을 통해 탁월함을 드러내는 실천 속에서 체계성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모든 실천의 발생원리이자 통일원리인 아비투스의 총괄적인 통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짓기 , 새물결, 2005, 316.

 

 

엘렌이 그토록 꿈꾸는 자유는 밍고트 가와 아처 가를 비롯한 뉴욕 상류층의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이물질이었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육체를 심상하게 노출시키는 갱스터 무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조차 순수의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 영화인지를 스스로 인정했다. 흔적 없이 존재를 잠식하는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을 그려낸 순수의 시대.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가 그가 감독한 어떤 영화보다 잔인한 영화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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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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