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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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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1. ‘구별짓기의 디스토피아: 짝퉁에도 등급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던 창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떨쳐입고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프리티 우먼), 감옥의 죄수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난생처음 예술의 감동을 만끽할 때(쇼생크 탈출), 우리는 왜 달콤한 해방감을 느낄까. 영국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의 야코를 납작하게 만든 후 총리 관사를 휘저으며 막춤을 추고(러브 액츄얼리),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평범한 서점 직원과 사랑에 빠져 눈물 흘릴 때(노팅 힐),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까.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런 파격적인 계급 배반의 환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현되는 행운을 누리기 어렵지 않을까. 자신이 속한 계급의 도식적 이미지를 일탈하는 캐릭터에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나치게 촘촘한 문화적 구별짓기의 그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이제 단지 경제적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일까. 현대인은 점점 정교한 잣대로 개인의 사회문화적 위치를 식별하고 서열화한다. 통장 잔고나 부동산 소유 여부를 넘어 소비와 취향의 잣대로 개인의 사회적 좌표를 확인하는 풍속. 그것은 마치 대단한 상품에 어울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는 듯한 거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갈 땐 동창회 갈 때만큼이나 공들여 화장을 하고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특히나 이 백화점은 분위기가 유난하다. (……) 똑같이 맨얼굴로 서 있어도 이 동네 사람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피부는 때깔에서 차이가 난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 그게 걸치고 있는 입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작가세계] 2006 여름, 228.

 

 

맨얼굴의 피부와 표정만으로도 이 동네 사람과 외지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믿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외부인을 가려낼 수 있다는 확신. 강남 모 백화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화려하지만 폐쇄적인 이미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왠지 이방인처럼 서걱거리는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장벽을, 작가는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이라 이름 붙인다.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의 위력이 개인의 삶 깊숙이 침투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계급의 논리로 판가름한다. 이러한 무한 소비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인터넷 문화 중 하나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이다.

 

코디가 안티야?’라는 말이 유행이 되는 시대. 스타들은 옷 한 번 잘못 입고 나왔다가는 너무 쉽게 굴욕의 주인공으로 추락하고 만다. 네티즌의 매서운 눈썰미로 매일매일 업데이트 되는 같은 옷, 다른 느낌코너는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따로따로 서 있으면 저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스타들이 같은 옷, 다른 느낌의 올가미에 걸리면 여지없이 승자 vs 패자의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만다.

 

네티즌들은 스타들이 우연히 똑같이 입은 옷의 브랜드는 물론 제조년월과 가격까지 빠삭하게 추적해낸다. 평소에 각자의 개성으로 빛나던 두 스타들의 아름다움이 같은 옷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비교되는 순간 승패는 잔인하게 판가름 난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같은 옷에 구겨 넣고 이 옷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네가 아냐!’라고 선고하고 싶은 공격적인 욕망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찾아내서 서열에 따라 줄 세우고 싶은 이 욕망의 뿌리는 무엇인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은 아무리 명품으로 도배해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감각의 차이가 있다는 소비사회의 무의식을 뼈아프게 형상화한다. 옷차림을 통해 그의 성장 환경 뿐 아니라 뿌리 깊은 무의식까지 진단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짝퉁 사이에도 엄연한 등급이 있어 얼마나 명품을 완벽하게 재현하는가를 기준으로 상품의 가격이 매겨지는 사회. 우리가 매순간 결정하는 소비의 품목들, 먹고 마시고 입고 듣고 보고 즐기는 모든 것들에서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를 진단하는 것, 그것이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대의 지성으로 격찬받았던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시선이었다. 부르디외의 학문적 관심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제조되는가였다.

 

내가 너보다 요만큼 낫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증명해보여야 간신히 체면이 유지될 수 있는 삶, 레이스와 찻잔과 찻숟가락 하나하나에서도 자신의 귀족적 정체성을 일일이 박아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 이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 격조 높은 고고함의 미장센으로 은폐된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장(戰場), 그곳은 1870년대 뉴욕이었다. 순수의 시대는 우리가 매순간 뼈저리게 의식하지만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매끄러운 순수를 가장해야 하는, ‘너와 나의 다름에 대한 풍요로운 인류학적 보고서다.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귀족문화의 퍼레이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현한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은 지금의 뉴요커와 판이하게 다른 패션과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있다. 199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영화의 명성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빈틈없이 기획된 드레스와 분장, 소품과 인테리어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옷은 단지 날개가 아니라 존재그 자체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은 걸릴 듯한 그들만의드레스 코드는 과연 저 옷을 입고 화장실엔 어떻게 갈까라는 관객의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토록 화려하지만 매우 비실용적인드레스로 온몸을 꽁꽁 결박한 귀족들이 낯선 이방인엘렌 올렌스카 부인(미셸 파이퍼)을 험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밍고트 집안사람들이 저럴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메이 웰렌드 양 옆에 앉히다니 이상하군요.”

저 여자의 인생 자체가 이상하지.”

 

 

이 추악한 험담이 오가는 곳은 다름 아닌 귀족적인공간의 대명사, 뉴욕의 오페라하우스다. 엘렌은 의상부터 남다르다. 피부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이들의 의상에 비해, 엘렌의 의상은 시원하게 목과 가슴골이 드러나는 도발적인 드레스다. 엘렌의 사촌 메이 웰렌드(위노나 라이더)의 약혼자인 뉴랜드 아처(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엘렌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엘렌은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작렬하는 고운 미소로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민다. 카메라는 그녀만의 다름을 유난히 강조하듯, 장갑을 끼지 않은 그녀의 뽀얀 맨손을 클로즈업한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장소에 가든 눈이 시리도록 하얀 장갑을 착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엘렌의 손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원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커다란 반지를 두 개씩 착용하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빛깔의 장갑을 착용하기도 한다. 약혼자의 키스를 받을 때조차 단정하게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메이와 달리, 엘렌은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맨손을 내민다. 그녀가 뉴랜드 아처에게 건네는 첫마디부터가 심상치 않다. 엘렌은 뉴랜드의 손을 반갑게 맞잡으며 심상하게 옛 추억을 이야기한다. “기억나요? 우리 반바지에 속바지 차림으로 뛰놀았잖아요.” 뉴랜드가 얼굴을 붉히자 그녀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고 편안하게 속삭인다. “문 뒤에서 내게 뽀뽀한 거 기억나요?”

 

엘렌과 뉴랜드는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친구다. 유럽에서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와 따스한 관심과 친절 속에 살아가고 싶어 한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분방한 삶을 익힌 그녀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 남편의 냉대와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 것이다.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그녀를 반겨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렌의 귀환이 아니라 엘렌의 스캔들에만 관심이 있다. 지난 50여 년간 일어났던 상류사회의 스캔들을 일일이 메모하여 늘 지니고 다니는 실러튼 잭슨은 현대사회의 파파라치를 방불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엘렌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낱낱이 캐내려 한다. 엘렌이 남편에게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비서와 엘렌이 동거했다는 괴소문 또한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다.

 

메이가 속한 밍고트 가문과 뉴랜드의 아처 가문은 뉴욕의 두 명문가로서 두 사람의 결혼은 전통과 권력의 환상적인 결합이었다. 그들은 엘렌이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잣대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의 자발적인 이혼을 결심한 엘렌을 교묘하게 따돌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엘렌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들만의 잣대로 감시하고 관리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엘렌은 변호사인 뉴랜드 아처에게 자신의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를 자문한다. 그러나 아처가의 사람들은 뉴랜드에게 법적 어드바이스가 아니라 이혼을 금지하는 어드바이스를 해주길 바란다. 뉴랜드의 가족들은 엘렌의 옷차림은 물론 이름까지 트집을 잡는다.

 

 

엘렌이 오후엔 어떤 모자를 쓸지 궁금하네요.”

오페라에 입고 온 드레스는 형편없던데.”

불쌍한 엘렌. 그 애의 성장과정을 알면 이해가 돼.”

첫 연회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에게 뭘 바래?”

백작 부인이면서 왜 엘렌 같은 이름을 고수할까요. 나라면 일레인으로 바꿨을 텐데.”

 

 

도대체 엘렌일레인사이에 무슨 엄청난 아우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아처의 여동생은 어이없는 성명학적 편견까지 과시한다. 우아한 식탁 매너를 고수하면서 마치 복화술처럼 조용히 이루어지는 이 험악한 대화에 뉴랜드 아처는 소름이 끼친다. “왜 그녀는 돋보이면 안 되죠?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고 얼굴도 못 들고 다니나요?” 그녀가 비서와 동거했다는 추문을 믿는 친척에게 아처는 항변한다. “그게 어때서요? 그녀도 새 삶을 살 권리가 있어요. 왜 여자만 매장당하죠? 창녀와 재미 보는 남편은요?”

 

가족과 친척들과 옛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향의 향수를 되살리고자 하는 엘렌의 꿈은 시작부터 무참하게 박살난다. 그리고 이 현대판 샤리바리(charivari,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의 현장에서 이미 엘렌은 그들만의 리그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로 낙인찍힌다. 격식이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는 엘렌의 취향은 밍고트 가와 아처 가의 취향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감각의 바이러스였다. 부르디외의 말처럼, ‘취향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이 아니라 계급의 지표로 기능하는 것이다. 엘렌의 존재가 문제적인 이유는 그녀가 귀족의 혈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적 취향아비투스를 실현하지 않기에 그들만의 리그에 결코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들의 우아한 미소와 으리으리한 의상은, 빈틈없는 테이블 세팅과 고상한 파티 매너는,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과시하여 이방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는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행위자체에 혁혁한 의미를 부여한다. 막상 오페라 관람 중에는 남들 뒷담화나 일삼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예술을 즐기는 척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예술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뉴욕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하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처마저도 개인이 아니라 상류층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는 그들의 집단적 아비투스를 대변한다.

 

 

뉴랜드 아처에게 취향에 대한 모욕보다 끔찍한 것은 거의 없었다. 취향은 예법조차도 거기 비하면 단지 외적인 표현이며 부차적인 지위에 불과할 정도로 손에 닿지 않을 신성한 가치였다. 올렌스카 부인의 창백하고 진지한 얼굴은 지금 상황이나 그녀의 불행한 처지와 잘 맞아떨어져 그의 상상력에 호소했다. 그러나 터커(17~18세기 여성들이 걸친, 목에 걸어 가슴에서 합친 마직, 모슬린 따위의 천)도 없는 드레스가 야윈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그는 충격과 함께 곤혹감을 느꼈다. 메이 웰랜드가 이렇게 취향의 명령에 무신경한 젊은 여자의 영향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졌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3.

 

 

뉴랜드에게 그가 오랫동안 갈고닦아온 취향은 신성불가침의 소중한 가치였다. 최신 유행과 귀족적 취향에는 전혀 무관심한 엘렌 올렌스카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뉴랜드 아처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는 예법과 매너를 비롯한 공동체의 암묵적 규약을 일탈하는 엘렌을 이성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남다름에 이끌린다. 당시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엘렌은 따분한 파티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뉴랜드에게 당당하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자유의 불온한 매력이 뉴랜드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뉴랜드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중 파티 장소에 메이가 도착하자 어서 빨리 메이에게 가보라고 속삭이던 엘렌. 그러나 메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환영받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랑 조금만 더 있어요.” 올렌스카 부인이 아주 작게 속삭이며 깃털 달린 검은 부채로 그의 무릎을 가볍게 친다. 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뉴랜드는 뜨거운 애무를 받은 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그들은 엘렌을 따돌리기 위해 그 어떤 드러나는사전 모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귀족적 아비투스는 이미 무의식에까지 각인되어 있기에 애써 서로의 의견을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지휘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한 여인을 냉대하고 해부하고 힐난하고 배제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우아하게 왈츠를 추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하게 엘렌의 부적절한행동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 줄리어스 보퍼트와 함께 5번가를 활보하다니, 엘렌이 실수했어.” 그들에게는 이혼하고 싶은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엘렌의 자유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엘렌의 친척들은 엘렌이 살고 있는 동네가 글쟁이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의 냄새를 풍긴다며 그녀의 거처까지 옮기라고 종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한다. 뉴랜드의 약혼자 메이는 이 순수의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마스코트이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엘렌 추방 작전의 숨은 선봉장이다. 메이가 태어나고 자라 오직 그것만이 세계이자 우주 전체라고 믿는 귀족들의 커뮤니티는 메이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4.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당신과 논쟁을 할 만큼 영리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런 건 좀…… 천박해요, 그렇잖아요?” 메이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 그것은 천박하게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보기에 그런 천박한사랑의 도피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나 벌이는 작태였던 것이다.

 

메이의 주요 의상과 장신구의 특징은 주로 순백색을 위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메이의 티없이 희고 고운 피부와 절제된 순백의 드레스, 시리도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진주목걸이, 뉴랜드가 그녀에게 매일 아침 선물하는(!) 희디흰 백합. 이 모든 것은 뉴욕 상류층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순수미장센이다. 온몸을 순결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무장한 듯한 메이의 빈틈없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그녀에게 악의라는 것이 있을까의심할 정도로 숨 막히게 압도적이다.

 

한편 엘렌은 붉은색을 위주로 한 정열적인 드레스와 열정을 상징하는 노란 장미로, 메이의 순백색 코디에 눈이 먼 아처의 눈을 어지럽힌다. 메이가 언제든 나의 순수를 위협하는 그 어떤 타자라도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극도의 방어적 캐릭터를 순백의 코디네이션으로 은폐하는 반면, 엘렌은 의상 자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뉴랜드는 그녀들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노란 장미를 발견해냈다. 노을빛을 닮은 샛노란 장미는 이제껏 처음이었다. 처음엔 백합 대신 메이에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아름다움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정열, 그것이 바로 엘렌만이 가진, 뉴욕의 귀족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관능적 아름다움이었다. 절제와 품위, 금욕과 순결을 숭배하는 밍고트 가문의 집단적 아비투스와는 아울리지 않는.

 

아직 엘렌은 자신이 처한 곤경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뉴욕은 그녀의 고향이었기에 엘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그들의 커뮤니티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어두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뉴랜드는 그녀가 이혼 때문에 얻을 엄청난 불이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노예처럼 가둬 사육하는 잔인한 남편을 피해 고향으로 달아났지만, 뉴랜드가 보기에 고향만큼 위험한 곳은 없었다. 그녀의 이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온갖 추문의 굴레를 씌워 협박할 사람들도 고향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엘렌은 해맑은 얼굴로 말한다. “이젠 모두 털어버리고 완전한 미국인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그러나 뉴랜드는 알고 있다. 미국인, 게다가 뉴욕의 귀족이 되는 일은 돌아온 탕아엘렌에게 너무 어려운 도전임을. 아처는 그 모든 재산과 유럽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왜 이혼을 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엘렌은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대답한다. “자유를 얻잖아요.” 뉴랜드는 왠지 그녀가 말하는 자유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관능의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고고한 귀족가문의 규수들만을 상대했던 뉴랜드에게 엘렌은 숨길 수 없는 이국적 매혹으로 다가온 것이다. 엘렌이 원하는 자유는 뉴랜드가 즐겨보는 머나먼 나라 일본의 판화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방의 세계처럼 불가해한 판타지였다.

 

아직 엘렌은 알지 못한다. 그토록 심플한 자유를 얻기 위해 그녀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정의롭고 낭만적이며 보기 드물게 여성친화적인 뉴랜드 아처는 그녀를 돕고 싶다. 그러나 그 또한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물들어 있는 뉴욕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오랜 시간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만들어낸 암묵적 규약이며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을 넘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육체에 각인된 것임을. 아비투스는 개인이 그 메카니즘을 인식하지 못할 때 더욱 선명하게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가 매순간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소비의 선택조차도 우리를 조각해온 집단적 아비투스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인과 집단을 둘러싸고 있는 집, 가구, 그림, , 자동차, , 담배, 향수, 옷 등과 같은 특성들 전체와 스포츠, 게임, 문화적 여가활동 등을 통해 탁월함을 드러내는 실천 속에서 체계성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모든 실천의 발생원리이자 통일원리인 아비투스의 총괄적인 통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짓기 , 새물결, 2005, 316.

 

 

엘렌이 그토록 꿈꾸는 자유는 밍고트 가와 아처 가를 비롯한 뉴욕 상류층의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이물질이었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육체를 심상하게 노출시키는 갱스터 무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조차 순수의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 영화인지를 스스로 인정했다. 흔적 없이 존재를 잠식하는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을 그려낸 순수의 시대.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가 그가 감독한 어떤 영화보다 잔인한 영화라고 증언했다.

 

 

 

5. 아비투스의 딜레마,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사람에겐 불친절하지만 신용카드에게는 모두 친절하지.” 명품매장이 즐비한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경쾌하게 활보하는 비비안은 이제 더 이상 거리의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친구는 몰라보게 변한 비비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멋지다! 거리 출신 티는 하나도 안 나!” 비비안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야.” 비비안이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했던 테이블 매너와 우아한 자태는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전용기까지 타고 날아가 오페라를 본다 해도 그녀가 그들만의 리그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예절 바른 냉대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널 창녀 취급한 적 없어.”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 창녀라는 단어를 내뱉음으로써 뜻하지 않게 그녀를 모욕하고 만다. 비비안은 쓸쓸하게 독백한다. “방금 그랬잖아요.” 그의 뜻하지 않음속에서, 즉 그의 무의식 속에서 그는 한 번도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티 우먼은 결국 비비안의 동화 같은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이 양극화된 세계의 갈등을 달콤하게 은폐한다. 순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인 영화다. 엘렌의 1차적 아비투스는 뉴욕의 상류층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유럽에서의 자유분방한 문화생활과 결혼생활의 산전수전을 통해 습득한 2차적 아비투스는 달랐다. 엘렌의 취향과 행동 속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 습득한 1차적 아비투스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것 자체가 비관습적이지만(unconventional), 남성에게 맨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한다거나 당당하게 맞담배를 피우는 것,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등등은 사사건건 그들만의 리그가 오매불망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혼을 향해 공동체가 내린 판결은 그것이 불쾌하다(unpleasant)’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이혼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양가는 소문이 무성한, 이혼한 여자가 존재하는 집안의 일원이 되기를 한결같이 거부했던 것이다.

 

 

 

6. 너는 우리와 달라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뉴스거리가 되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마다 버전-업되어 욕먹으면서도세계적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노파심은 이 아비투스의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해가라는 현명한(?) 처세술일까. 뉴랜드가 엘렌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맨손과 담배와 과감한 의상에 매번 화들짝 놀라는 것은 그가 습득해온 취향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중매자라고. 취향이라는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나는 남녀는 각자 자라온 아비투스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양, 자기 취향에 딱 맞는사람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천생연분은 기실 우리의 치밀한 무의식의 용의주도한 주판알 굴리기를 통해 계산된 아비투스의 연합이 아닐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나의 취향을 거스르는 사람과는 상대하기 싫다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7. 몸의 속삭임에 굴복한 마음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러러 보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무엇보다도 몸의 철학이다.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 수많은 관습과 욕망의 문신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천 년 동안 투쟁하며 합의해온 육체의 행동 패턴.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이유는 그것이 성문화된 법전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의 명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을 숨길 수 없는 이지 언제든 화려하게 분장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닌 셈이다.

 

순수의 시대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몸과 자꾸만 변해가는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뉴랜드 아처다. 엘렌은 뉴랜드의 인생에 있어 취향과 욕망 사이에 치명적인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취향의 공동체에서는 메이야말로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번도 목격한 적 없는 종류의 인간, 자신이 살아온 취향의 공동체와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한 엘렌을 만나자마자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잔심부름하는 하녀가 심부름 나갈 때 추울까봐 자신의 오페라 망토를 직접 입혀주는 엘렌, 모두가 수군거리며 욕하는 유명인사 버포트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엘렌. 뉴랜드는 자신도 모르게 꽃가게에서 한 번도 눈독 들인 적 없는 노란 장미를 사서 엘렌에게 선물하는가 하면, 엘렌이 직접 불 붙여준 담배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녀와 태연하게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비난하는 여동생 앞에서 그녀를 열정적으로 변호하기도 한다. “그녀 덕분에 밴 더 루이든 가문의 파티가 그 갑갑한 장례식 분위기를 떨쳐버렸다고!”

 

그는 자신이 마치 엘렌 올란스카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선언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이상에 따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의 어머니 웰렌드 부인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외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꾸며 낸 희한한 이야기일 뿐이지.” 엘렌의 출현으로 인해 그는 그의 인생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취향의 올가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허용하지 않던 유럽을 떠나 자유의 땅미국으로 돌아온 엘렌의 낭만적 이상은 끔찍한 허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뉴랜드는 그녀가 더 이상 추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의 이혼을 만류한다. 그러나 엘렌의 이혼을 막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남자 앞에서 감히담배를 피워대고 품위 없이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이야기한 첫 번째 여자였다. 그의 합리적 이성은 가문의 품위 유지를 위해 엘렌의 이혼을 막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육체는 체면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거리낌 없는 웃음과 눈물, 거짓 없는 몸짓과 사랑스런 표정에 이끌렸다. 이 취향과 욕망의 균열 속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청난 일탈을 기획한다. 맨슨 후작부인이 엘렌의 남편이 지닌 엄청난 재력을 부러워하며 그녀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뉴랜드는 엘렌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 애가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아시겠어요? 소파 위에 있는 저 장미, 저런 것이 니스에 있는 남편의 으리으리한 정원 온실 안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구요. 보석은 또 어떻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주며 소비에스키 에메랄드, 검은 담비털 하며…….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치다니! 그림이며 귀한 가구들, 음악, 지적인 대화……. , 아처 씨, 미안한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건 꿈도 못 꾸어 보았을 걸요! 그앤 그 모든 것을 맘껏 누렸다우. 모두 그 애를 여왕처럼 떠받들어주었지. 맙소사! 그애 초상화가 아홉 차례나 그려졌다고요. 유럽 최고의 화가들이 그애의 초상을 그리는 특권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했지.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 깊이 뉘우치고 있는데도?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03.

 

 

이렇듯 뉴욕의 귀족들은 도도하고 고집 센엘렌이 버리고 온 탐스러운 문화자본에 침을 흘릴 뿐, 엘렌이 결혼생활 내내 감내한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뉴랜드의 눈에는 그제야 엘렌 올레스카가 이제 막 지옥의 불길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뉴랜드는 엘렌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뉴랜드는 엘렌이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작부인에게 격노하여 품위 따윈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차라리 그녀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낫겠어요!” 뉴랜드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던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감정의 파문을. 처음으로, 몸의 속삭임에 마음이 굴복한 것이다.

 

 

 

8. 메이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순수

 

 

1921년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종주의가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황인종의 이민이 홍수를 이루자 미국인들은 이것을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 선포한다. 188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을 합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남부 유럽인들도 반몽고인이기 때문에 중국인과 똑같은 법을 적용해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백인들은 황인종의 카테고리에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피부색이 옅은 흑인, 유태인, 폴란드 인, 헝가리 인, 이탈리아 인, 아일랜드 인까지 포괄하여 다인종사회의 위협을 가시화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던 극우 비밀결사 KKK가 활개를 치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백인의 피가 외국인의 피와 섞여 저열한 잡종(!)’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혼혈아란 무정형적이며 형태가 없는 흐릿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앵글로색슨의 피는 친절하고 섬세한 피라는 둥, 스페인 계·멕시코 계·포르투갈계의 피는 야만적이고 타락한 피라는 둥, 그 잔혹한 배제와 추방의 수사학은 실로 기상천외하기 이를 데 없었다(이 작품이 그리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허정애, '인종주의 우화로서의 순수의 시대', [영미어문학] 56, 1999, 65~84).

 

순수의 시대우리라 불릴 수 있는 내집단(in-gruop)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은밀한 배제와 노골적인 혐오감을 그린 우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앵글로색슨 상류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상징적 마스코트가 바로 메이 웰렌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관능적이며 예술을 사랑하고 독창적이며 반사회적인 엘렌과는 달리, 메이는 경험이나 융통성, 판단의 자유 등을 갖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훈련된양가집 규수다. 메이는 남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천연두에나 걸리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메이의 순수는 곧 다인종 시대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백인 상류층의 공포와 불안을 상징한다. 메이가 보기에 엘렌이 불행해진 이유는 그녀가 외국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엘렌의 결혼은 가문의 혈통적 순수를 위협하는 잡혼(雜婚)’이었던 것이다.

 

영화 순수의 시대메이의 순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뉴랜드와 엘렌의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메이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사랑의 암호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엘렌은 뉴랜드처럼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뉴랜드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엘렌은 말한다.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뉴랜드는 처음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렌의 모순적 어법에 스민, 치유 불가능한 슬픔의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렌이 뉴랜드의 첫 키스를 받아들이자마자 메이에게서 급작스런 편지가 도착한다. “드디어 결혼을 승낙받았어. 꼭 한 달 후야. 아처에게도 전보를 칠 거야.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사촌 메이 보냄.”

 

뉴랜드의 사랑은 엘렌의 인내나 메이의 의지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전에 메이에게 빨리 결혼을 앞당기자고 졸랐다가, 오늘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오늘 날아온 전보의 내용에 따라 다시 메이와 결혼을 수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그는 엘렌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훼손할 용기도 없었고, 메이와 결혼하여 엘렌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접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메이는 뉴랜드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하고 결혼을 앞당긴 것이다. 메이와 뉴랜드는 드디어 결혼한다. 엘렌은 마치 모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초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떠나며 결혼선물을 남긴다. “아처는 전통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자기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아내를 애써 해방시킬 필요가 없었다.”

 

메이의 순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혈통과 취향의 커뮤니티 내에서는 한없이 친절하지만(그녀는 뉴욕 사교계 내에서는 최고의 현모양처다), 그 커뮤니티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교란시키는 존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잔인하다. 말하자면 메이는 부리는 하녀에게 헌옷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녀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며, 우연히 마주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 수는 있어도 거지와 말을 섞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준수되는 게임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메이에게 엘렌은 그녀의 커뮤니티, 특히 미래의 가정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밍고트 가문의 순수를 더럽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엘렌의 행실을 문제삼기 시작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메이는 남편에게 엘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엘렌은 뉴욕과 집은 내팽개쳐두고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닌대요. 엘렌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해버릴까 봐 미도라 이모가 엘렌을 지키고 있다지 뭐예요. 무엇보다도 엘렌은 왜 남편과 잘 지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뉴랜드는 전에 없이 준엄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 메이의 태도에 경악한다.

당신이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잔인하다고요?”

악마일지라도 지옥에 있는 사람이 행복할 거라고 말하진 않아.”

메이는 그 투명한 순수로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차분하게 대꾸한다.

그러게 외국으로 시집가지 말았어야죠.”

메이의 눈에 비친 엘렌은 외국에 시집간 중뿔난 사촌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메이의 순수는 취향의 공동체 내부의 위생상태를 순도 99.99%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라는 오염물질을 여과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순수다. 메이는 신혼여행 기간 동안 유럽에 있을 때 유럽 귀족들도 놀랄만한 화려한 의상을 입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유럽인들이 우리를 보고 야만인들처럼 옷을 입는다고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말하는 야만인은 정확히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이었다. 인디언은 야만인이고 자신은 문명인이라는 식의 태도는 명백히 인종주의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뉴욕 사교계의 순수성을 대변하는 메이의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메이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그것은 포카혼타스가 격분할지도 모르는 경멸적인 태도라고.

 

 

 

9.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르디외의 책 재생산(장 클로드 파세롱·피에르 부르디외, 이상호 역, 동문선,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문화지배의 재생산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분석한 책으로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홍성민 지음, 살림, 2004)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머나먼 프랑스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 이야기인 듯, 슬프도록 익숙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문화적 재생산의 역할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열로만 따지면 명실공히 세계 1위를 다투는 한국.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힘겹게 축적한 상징자본이 그만큼의 문화적 지배를 재생산하지 못한다는 박탈감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경쟁이 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력조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될 수 없다는 집단적 패배감 또한 구별짓기의 격화에 따른 문화적 효과라 할 수 있다. ‘학파라치까지 만들어 사교육 열풍을 막는다는 정부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엄연히 존재하는 구조적 갈등을 전시행정으로 은폐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일 수밖에 없다.

 

엘렌은 뉴욕 상류층의 문화적 환경에서 볼 때 가장 저급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할 때 늘 불쌍한 엘렌이라고 운을 떼는 밍고트 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엘렌이 받은 교육은 비체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엘렌의 부모는 방랑벽이 심했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죽었다. 엘렌이 받은 교육은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먼 데생이나 피아노 5중주 같은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것이었다. 엘렌은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이 저급한 문화로 멸시하는 플라밍고를 멋들어지게 추고 나폴리 연가를 시원하게 부르는 등 이국풍(outlandish) 예능에 소질이 다분한 보헤미안 소녀였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뉴욕 백인 사회에서 그녀가 받은 이질적인 교육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에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매혹적인 엘렌의 이국 취향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균질한 취향의 커뮤니티잡스럽고 이질적인 외국취향으로 물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녀의 문화적 취향뿐 아니라 사람을 사귀는 취향 또한 사교계의 암묵적 규약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엘렌은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지닌 벼락부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스트러더 부인과 사귀는가 하면, 소문난 바람둥이 보퍼트를 거리낌 없이 만난다.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엘렌은 소외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반사회적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엘렌 또한 공동체의 시선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운 순수한영혼이다. 관습에 순종하며 이질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메이의 순수(purity)와는 달리, 엘렌의 순수는 자신의 욕망감정에 솔직하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순수함(honesty)이다.

 

 

 

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와 친구들까지 간섭하는 귀족들의 노골적인 금족령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피란(?)을 간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도피는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마치 비즈니스상의 이유인 듯 가장하며 그녀를 급작스레 방문한 뉴랜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그 순간에도 비관습적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주는 모범생 뉴랜드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비관습적인 행동을 했다고. 거액을 제시하며 자신과 만나줄 것을 부탁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뉴랜드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친다. “당신은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진짜 삶을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강요했어요. 누군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러나 절대로 나약해보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말한다. “, 견디고 있어요(I'm enduring it).” 뉴랜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차분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가식과 허세로 가득한 뉴욕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전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 미국을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다만 멀리서라도 뉴랜드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뉴랜드가 안전하게 양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것을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의 슬픈 미소 뒤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극장이나 피로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될 수도 있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될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보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그녀의 순수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주 먼발치서라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홀대하는 뉴욕에 남는다.

 

함께 있지 않지만 어디서든 함께 있고, 멀리 있지만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를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 엘렌의 역설적인 사랑법은 열정과 욕망을 동경하지만 도덕과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정결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엘렌의 순수는 가문이나 혈통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코 학습되지 않은순수였다.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엘렌의 원칙은 처음부터 단순했다. 그 모든 위험과 비방을 감수하고 왜 그토록 이혼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유를 얻잖아요!”

 

 

 

11.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한, 뉴랜드의 순수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뒤로 미루며 스스로의 의견을 직접 내놓기를 꺼린다. 엘렌의 이혼을 만류할 때도 그는 다만 가문의 생각이 이러저러하다고 멋들어진 설교를 늘어놓았다. 엘렌은 물었다. “그들의 생각 말구요.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요. 당신도 이혼이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순간 뉴랜드는 당황한다. 언제나 논리 정연한 정답을 준비해놓은 듯한 그의 두뇌 속 매뉴얼에는 나만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도 그는 늘 결정을 외부의 힘에 맡겨버린다. 그는 신혼여행 직후에 엘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다를 바라보는 엘렌의 아련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면 충분히 들릴 만한 위치에서도 그는 그녀를 부르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배가 등대를 지나기 전에 그녀가 뒤돌아보면 그녀에게 가겠다고 말이다.”

 

엘렌은 독서와 예술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뉴랜드에게 그 환상이 현실로 바뀔 수도 있음을 증명한 모험의 안내자였다. 한편 메이는 모험이라는 단어를 두뇌 속 사전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메이는 자신에게 맞는 취향의 수질관리를 하느라 주변의 모든 환경을 자신의 빛깔로 정화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결벽증적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도 지나친 자유를 꿈꾸는 것조차 금지한다. 남편이 읽는 책의 검열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책을 읽어요?”

일본에 관한 책이야.”

왜 그런 걸 읽지요?”

모르겠어. 그냥…… 다른 나라니까.”

당신이 시를 읽어줄 때가 좋았는데.”

 

 

메이의 마음속에서는 머나먼 나라, 가볼 수도 없는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불쾌한 일이다. 메이가 그리는 귀족가문의 서재 풍경은 남편이 낭만적인 시를 읽어주고 아내는 우아하게 수를 놓는 것이다. 뉴랜드는 마음속에서만 독백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아내가 죽으면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는 아내라는 선명한 현실과 싸워 자유를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모험과 자유를 방해하는 상상 속의 간수라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킨다.

 

그에게는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현실의 쾌락은 위험한 기회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결정적인 순간 늘 중요한 선택을 여성들에게 미룬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아내를 원망하지만 결국 그의 아비투스가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엘렌과 함께 여행을 떠날 별장의 열쇠가 들어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외투를 탈출하지 못할 것이며 엘렌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현실보다 상상이 매혹적이기 때문에.

 

 

 

12. 낭만적 환상에만 만족하는, 뉴랜드의 순수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나타나자 밋밋한 메이에게 싫증을 느끼고 메이를 가짜 순결, 오싹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잉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만의 특이성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엘렌과 메이, 두 세계의 사이에 끼어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결코 메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아처의 다른 점은 그에게는 문화적 유체이탈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관행을 끊임없이 객관화시켜 그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언제나 그 비판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는 엘렌의 환송 만찬회에서 역시 다른 여인들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엘렌의 맨손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마지막 소원을 빌어본다. ‘이 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어라고. 그러나 곧 자신이 화려한 만찬을 가장한 사교계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주인의 왼쪽에 앉음으로써 이 만찬이 외국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렌스카 부인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별선물보다 더 교묘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에서, 성급한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이 전해져 오는 죽음과 같은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410~412.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엘렌과 아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수 년만에 돌아온 엘렌의 환영 만찬회 때는 노골적으로 집단 보이콧을 했던 바로 그 인사들이었다. 이제 엘렌이 추방당할 때가 되니 얼씨구나 하고 환송 만찬회를 열어주며 외국인의 추방을 기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을 몰아내기 위해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뉴욕 사교계의 공식 마스코트 메이였다. 메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엘렌을 좌절시켰고, 메이가 잽싸게 준비한 엘렌의 환송 만찬회는 엘렌 추방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엘렌은 몇 주 후 자신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듦으로써(그녀는 몇 주 후 임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뉴랜드마저 단념시킨다. 이제야 이 무서운 소문의 공동체의 힘을 깨달아버린 그는 고귀한 가문이라는 가족 납골당에 산 채로 매장당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환상을 엘렌에게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고 엘렌과 함께 진짜 세상에 나아가 전투를 벌일 용기는 없다. 환상의 쾌락에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의 쾌락너머에는 엄청난 기회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늘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조차 책으로만 경험하는 그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엘렌은 그가 마주친 유일한 실재이며 텍스트로 분석할 수 없는 야생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는 환상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13. 무한미디어, 사회를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금세 루저취급을 받는다. 아니,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루저로 단죄한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은 단지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이유로 남친에게 연락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버린 20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학비를 모은 뒤 남은 돈으로 멋을 부려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새로 산 치마 한 벌에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혼자만의 자신감에 휩싸여 캠퍼스를 날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 소품의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잘입기 위해 감각만큼 필요한 것은 생활의 여유라는 것을. 스물한 살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허영심이기 전에 소박한 순정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날, 남자가 여자의 옷맵시를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날 혼자 소주를 마셨던 남자는 여자가 잠적한 까닭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1~92.

 

 

세련된 옷맵시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남친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소박한 본능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좌절해본 모든 여성들은, ‘잘 빠진짝퉁 가방 앞에서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여본 적 있는 여성들은, 소설 속 이 여자의 말 못할 아픔을 이해할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는 귀족공동체의 승리를, 메이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으로 공동체의 순수를 엄호한다. 메이가 누리는 화려한 귀족풍의 의상과 웅장한 인테리어는 우리의 범주에서 그 어떤 일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의 제스처다. 엘렌의 환영만찬을 집단 보이콧했던 그들이 엘렌을 추방하기 위한 환송만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그들만의 순수를 사수하는 방식이다. 메이가 자아내는 티 없이 고운 순수의 이면에는 언제 자기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드리워놓은 감성의 그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뉴랜드는 엘렌의 집 앞에서 그녀의 집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현실 같군.” 이것은 가장 뉴랜드다운 방식이다. 환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뉴랜드는 환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기쁨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므로. 메이는 죽어서까지 그를 메이의 커뮤니티로 묶어둔다. 그가 메이의 이해에 감동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가 뉴욕 사교계의 아비투스를 드디어 완벽히 자기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토록 숨 막혀 하던 메이의 아비투스를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세포로 장기이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의 탁월함은 주관적인 감정까지 아비투스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감정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며, 감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이 고상한 귀족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우중충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메이에게는 불경한 감정이며 뉴랜드에게는 충격적인 감정이다. 개인의 흥분이나 동정심, 말할 수 없는 무의식까지도 감정의 사회학적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는 개개인의 말할 수 없는 욕망’, ‘표현되지 않는 욕망까지 상징적 권력의 동력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권력이란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 말한다. ,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루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고화된다. 알파걸, 엄친딸/엄친아,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을 상징하는 각종 별명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세대(88만원 받는 신입사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삼팔선(38세에 은퇴), 토폐인(토익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족), 취집(취업 대신 시집가기), 대오족(대학5학년생, 졸업을 미루는 학생)……. 이 모든 약자의 호명 또한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사회의 상징적 권력을 공고화한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문화권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지속될 수록 견고해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때, 누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질 때, 허리가 휘어지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뛸 것이라는 환상이 대중화될 때, ‘구별짓기의 문화적 파장은 더욱 사회 깊숙이 내면화된다.

 

우리는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투표한다. 우리는 모든 선거가 자유로운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비투스의 그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의식을, 무의식까지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조차도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지배계급의 논리에 따라 규격화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급 착시가 아닐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바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전달되는 권력 효과를 증명하는 개념이다. 단지 보수여당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결과적 행위만이 아니라 뉴타운 공약 여부에 따라 후보를 판단하는 유권자의 취향 자체가, 뉴스에 대한 일상적 무관심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며 투표일에 휴가를 떠나는 무관심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습관적 냉소라는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일상의 습속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추어 개인의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자각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군과 아군의 대립을 단지 보수 대 진보식의 커다란 구분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문화적 일상적 구별짓기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식과 강북식의 이분법도 있고 외제차와 국산차의 이분법도 있으며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이분법도 있으며 얼짱과 얼꽝식의 당혹스러운 구분도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하고 홍대 앞 클럽에서 출입자의 액면가로 입장권 배부 여부를 가리는 풍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걔는 나랑 친해’, ‘쟤는 나랑 안 친해식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구별짓기를 비롯하여 일상의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상징적 권력을 창조하기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냐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닫힌 선분을 만드는 모든 사소한 억압들과의 투쟁이라는 것을, 부르디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계급 배반이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아름다운 강남좌파, 노동자계급에게 음악과 회화와 그 모든 예술의 감동을 무료로 공급해주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구조조정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2080의 사회로 만든 신자유주의와 정면 승부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오늘도 이 모든 창조적 계급 배반의 상상 속 리스트를 채워보며 부르디외가 투쟁했던 현대사회의 새로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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