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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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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다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는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행위자체에 혁혁한 의미를 부여한다. 막상 오페라 관람 중에는 남들 뒷담화나 일삼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예술을 즐기는 척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예술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뉴욕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하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처마저도 개인이 아니라 상류층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는 그들의 집단적 아비투스를 대변한다.

 

 

뉴랜드 아처에게 취향에 대한 모욕보다 끔찍한 것은 거의 없었다. 취향은 예법조차도 거기 비하면 단지 외적인 표현이며 부차적인 지위에 불과할 정도로 손에 닿지 않을 신성한 가치였다. 올렌스카 부인의 창백하고 진지한 얼굴은 지금 상황이나 그녀의 불행한 처지와 잘 맞아떨어져 그의 상상력에 호소했다. 그러나 터커(17~18세기 여성들이 걸친, 목에 걸어 가슴에서 합친 마직, 모슬린 따위의 천)도 없는 드레스가 야윈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그는 충격과 함께 곤혹감을 느꼈다. 메이 웰랜드가 이렇게 취향의 명령에 무신경한 젊은 여자의 영향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졌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3.

 

 

뉴랜드에게 그가 오랫동안 갈고닦아온 취향은 신성불가침의 소중한 가치였다. 최신 유행과 귀족적 취향에는 전혀 무관심한 엘렌 올렌스카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뉴랜드 아처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는 예법과 매너를 비롯한 공동체의 암묵적 규약을 일탈하는 엘렌을 이성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남다름에 이끌린다. 당시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엘렌은 따분한 파티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뉴랜드에게 당당하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자유의 불온한 매력이 뉴랜드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뉴랜드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중 파티 장소에 메이가 도착하자 어서 빨리 메이에게 가보라고 속삭이던 엘렌. 그러나 메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환영받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랑 조금만 더 있어요.” 올렌스카 부인이 아주 작게 속삭이며 깃털 달린 검은 부채로 그의 무릎을 가볍게 친다. 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뉴랜드는 뜨거운 애무를 받은 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그들은 엘렌을 따돌리기 위해 그 어떤 드러나는사전 모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귀족적 아비투스는 이미 무의식에까지 각인되어 있기에 애써 서로의 의견을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지휘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한 여인을 냉대하고 해부하고 힐난하고 배제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우아하게 왈츠를 추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하게 엘렌의 부적절한행동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 줄리어스 보퍼트와 함께 5번가를 활보하다니, 엘렌이 실수했어.” 그들에게는 이혼하고 싶은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엘렌의 자유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엘렌의 친척들은 엘렌이 살고 있는 동네가 글쟁이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의 냄새를 풍긴다며 그녀의 거처까지 옮기라고 종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한다. 뉴랜드의 약혼자 메이는 이 순수의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마스코트이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엘렌 추방 작전의 숨은 선봉장이다. 메이가 태어나고 자라 오직 그것만이 세계이자 우주 전체라고 믿는 귀족들의 커뮤니티는 메이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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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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