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너는 우리와 달라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뉴스거리가 되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마다 버전-업되어 ‘욕먹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노파심은 이 ‘아비투스의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해가라는 현명한(?) 처세술일까. 뉴랜드가 엘렌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맨손과 담배와 과감한 의상에 매번 화들짝 놀라는 것은 그가 습득해온 취향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중매자라고. 취향이라는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나는 남녀는 각자 자라온 아비투스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양,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천생연분’은 기실 우리의 치밀한 무의식의 용의주도한 주판알 굴리기를 통해 계산된 ‘아비투스의 연합’이 아닐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나의 취향을 거스르는 사람과는 상대하기 싫다’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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