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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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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귀족문화의 퍼레이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현한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은 지금의 뉴요커와 판이하게 다른 패션과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있다. 199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영화의 명성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빈틈없이 기획된 드레스와 분장, 소품과 인테리어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옷은 단지 날개가 아니라 존재그 자체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은 걸릴 듯한 그들만의드레스 코드는 과연 저 옷을 입고 화장실엔 어떻게 갈까라는 관객의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토록 화려하지만 매우 비실용적인드레스로 온몸을 꽁꽁 결박한 귀족들이 낯선 이방인엘렌 올렌스카 부인(미셸 파이퍼)을 험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밍고트 집안사람들이 저럴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메이 웰렌드 양 옆에 앉히다니 이상하군요.”

저 여자의 인생 자체가 이상하지.”

 

 

이 추악한 험담이 오가는 곳은 다름 아닌 귀족적인공간의 대명사, 뉴욕의 오페라하우스다. 엘렌은 의상부터 남다르다. 피부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이들의 의상에 비해, 엘렌의 의상은 시원하게 목과 가슴골이 드러나는 도발적인 드레스다. 엘렌의 사촌 메이 웰렌드(위노나 라이더)의 약혼자인 뉴랜드 아처(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엘렌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엘렌은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작렬하는 고운 미소로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민다. 카메라는 그녀만의 다름을 유난히 강조하듯, 장갑을 끼지 않은 그녀의 뽀얀 맨손을 클로즈업한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장소에 가든 눈이 시리도록 하얀 장갑을 착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엘렌의 손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원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커다란 반지를 두 개씩 착용하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빛깔의 장갑을 착용하기도 한다. 약혼자의 키스를 받을 때조차 단정하게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메이와 달리, 엘렌은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맨손을 내민다. 그녀가 뉴랜드 아처에게 건네는 첫마디부터가 심상치 않다. 엘렌은 뉴랜드의 손을 반갑게 맞잡으며 심상하게 옛 추억을 이야기한다. “기억나요? 우리 반바지에 속바지 차림으로 뛰놀았잖아요.” 뉴랜드가 얼굴을 붉히자 그녀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고 편안하게 속삭인다. “문 뒤에서 내게 뽀뽀한 거 기억나요?”

 

엘렌과 뉴랜드는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친구다. 유럽에서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와 따스한 관심과 친절 속에 살아가고 싶어 한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분방한 삶을 익힌 그녀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 남편의 냉대와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 것이다.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그녀를 반겨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렌의 귀환이 아니라 엘렌의 스캔들에만 관심이 있다. 지난 50여 년간 일어났던 상류사회의 스캔들을 일일이 메모하여 늘 지니고 다니는 실러튼 잭슨은 현대사회의 파파라치를 방불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엘렌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낱낱이 캐내려 한다. 엘렌이 남편에게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비서와 엘렌이 동거했다는 괴소문 또한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다.

 

메이가 속한 밍고트 가문과 뉴랜드의 아처 가문은 뉴욕의 두 명문가로서 두 사람의 결혼은 전통과 권력의 환상적인 결합이었다. 그들은 엘렌이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잣대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의 자발적인 이혼을 결심한 엘렌을 교묘하게 따돌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엘렌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들만의 잣대로 감시하고 관리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엘렌은 변호사인 뉴랜드 아처에게 자신의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를 자문한다. 그러나 아처가의 사람들은 뉴랜드에게 법적 어드바이스가 아니라 이혼을 금지하는 어드바이스를 해주길 바란다. 뉴랜드의 가족들은 엘렌의 옷차림은 물론 이름까지 트집을 잡는다.

 

 

엘렌이 오후엔 어떤 모자를 쓸지 궁금하네요.”

오페라에 입고 온 드레스는 형편없던데.”

불쌍한 엘렌. 그 애의 성장과정을 알면 이해가 돼.”

첫 연회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에게 뭘 바래?”

백작 부인이면서 왜 엘렌 같은 이름을 고수할까요. 나라면 일레인으로 바꿨을 텐데.”

 

 

도대체 엘렌일레인사이에 무슨 엄청난 아우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아처의 여동생은 어이없는 성명학적 편견까지 과시한다. 우아한 식탁 매너를 고수하면서 마치 복화술처럼 조용히 이루어지는 이 험악한 대화에 뉴랜드 아처는 소름이 끼친다. “왜 그녀는 돋보이면 안 되죠?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고 얼굴도 못 들고 다니나요?” 그녀가 비서와 동거했다는 추문을 믿는 친척에게 아처는 항변한다. “그게 어때서요? 그녀도 새 삶을 살 권리가 있어요. 왜 여자만 매장당하죠? 창녀와 재미 보는 남편은요?”

 

가족과 친척들과 옛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향의 향수를 되살리고자 하는 엘렌의 꿈은 시작부터 무참하게 박살난다. 그리고 이 현대판 샤리바리(charivari,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의 현장에서 이미 엘렌은 그들만의 리그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로 낙인찍힌다. 격식이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는 엘렌의 취향은 밍고트 가와 아처 가의 취향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감각의 바이러스였다. 부르디외의 말처럼, ‘취향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이 아니라 계급의 지표로 기능하는 것이다. 엘렌의 존재가 문제적인 이유는 그녀가 귀족의 혈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적 취향아비투스를 실현하지 않기에 그들만의 리그에 결코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들의 우아한 미소와 으리으리한 의상은, 빈틈없는 테이블 세팅과 고상한 파티 매너는,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과시하여 이방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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