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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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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와 친구들까지 간섭하는 귀족들의 노골적인 금족령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피란(?)을 간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도피는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마치 비즈니스상의 이유인 듯 가장하며 그녀를 급작스레 방문한 뉴랜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그 순간에도 비관습적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주는 모범생 뉴랜드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비관습적인 행동을 했다고. 거액을 제시하며 자신과 만나줄 것을 부탁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뉴랜드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친다. “당신은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진짜 삶을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강요했어요. 누군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러나 절대로 나약해보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말한다. “, 견디고 있어요(I'm enduring it).” 뉴랜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차분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가식과 허세로 가득한 뉴욕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전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 미국을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다만 멀리서라도 뉴랜드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뉴랜드가 안전하게 양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것을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의 슬픈 미소 뒤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극장이나 피로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될 수도 있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될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보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그녀의 순수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주 먼발치서라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홀대하는 뉴욕에 남는다.

 

함께 있지 않지만 어디서든 함께 있고, 멀리 있지만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를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 엘렌의 역설적인 사랑법은 열정과 욕망을 동경하지만 도덕과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정결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엘렌의 순수는 가문이나 혈통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코 학습되지 않은순수였다.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엘렌의 원칙은 처음부터 단순했다. 그 모든 위험과 비방을 감수하고 왜 그토록 이혼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유를 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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