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낭만적 환상에만 만족하는, 뉴랜드의 순수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나타나자 밋밋한 메이에게 싫증을 느끼고 메이를 가짜 순결, 오싹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잉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만의 특이성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엘렌과 메이, 두 세계의 사이에 끼어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결코 ‘메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아처의 다른 점은 그에게는 문화적 유체이탈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관행을 끊임없이 객관화시켜 그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언제나 그 비판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는 엘렌의 ‘환송 만찬회’에서 역시 다른 여인들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엘렌의 맨손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마지막 소원을 빌어본다. ‘이 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어’라고. 그러나 곧 자신이 화려한 만찬을 가장한 사교계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주인의 왼쪽에 앉음으로써 이 만찬이 ‘외국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렌스카 부인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별선물보다 더 교묘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에서, 성급한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이 전해져 오는 죽음과 같은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410~412쪽.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엘렌과 아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수 년만에 돌아온 엘렌의 환영 만찬회 때는 노골적으로 집단 보이콧을 했던 바로 그 인사들이었다. 이제 엘렌이 추방당할 때가 되니 얼씨구나 하고 환송 만찬회를 열어주며 ‘외국인’의 추방을 기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을 몰아내기 위해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뉴욕 사교계의 공식 마스코트 메이였다. 메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엘렌을 좌절시켰고, 메이가 잽싸게 준비한 엘렌의 환송 만찬회는 엘렌 추방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엘렌은 몇 주 후 자신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듦으로써(그녀는 몇 주 후 임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뉴랜드마저 단념시킨다. 이제야 이 무서운 ‘소문의 공동체’의 힘을 깨달아버린 그는 고귀한 가문이라는 가족 납골당에 산 채로 매장당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환상을 엘렌에게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고 엘렌과 함께 진짜 세상에 나아가 전투를 벌일 용기는 없다. 환상의 쾌락에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의 쾌락너머에는 엄청난 기회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늘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조차 책으로만 경험하는 그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엘렌은 그가 마주친 유일한 실재이며 텍스트로 분석할 수 없는 야생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는 환상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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