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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건방진방랑자 2021. 7. 2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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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행동은 오직 반항의 대가로만 존재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나면 종종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말의 주인공의 되지 못한 존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과천선(改過遷善)했을까. 내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준 마녀가 아직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심술쟁이 언니들이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채 결혼 시장을 헤매고 있었으며,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된 오누이를 놓치고 썩은 동아줄을 붙잡아 추락사한 호랑이가 다시 살아나 어디선가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마녀들, 괴물들, 악당들이 때로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더 매혹적인 공상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그들은 정말 도저히 구제불능인 천하의 악역들이기만 했을까.

 

 

 

 

우리가 읽은 동화를 대부분이 어린이를 교화시키기 위해(?)’ 각색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꿈틀대던 악녀들과 괴물들이 더욱 마음 놓고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영원한 징벌의 대상으로 굳어져버린 악역들에 대한 호기심이 탄력을 제대로 받아 아예 동화의 내용 자체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진짜 잘못은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아니라 마녀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엄지 공주 이야기에서 엄지 공주의 간택을 받지 못한 두꺼비와 풍뎅이와 두더지 총각들은 정말 엄지 공주 같은 퀸카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할까.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을 삶아 먹으려던 노파는 정말 마녀였을까. 동화 속에서 악인으로 처벌받는 존재들은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아직도 죽거나 사라지지 않은 채, 좀처럼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토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날조된 동화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슈렉은 정말 반가운 작품이었다. 동화 날조의 달인들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월트 디즈니 공화국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식인 괴물 오거(ogre)를 자칭하는 슈렉(shrek)은 별로 무섭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동화 속에서 끝내 버려지고 짓밟히는 괴물의 기본 요건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동화 나라에서 추방된 온갖 생물들이 슈렉의 서식지인 (swamp)’으로 도망 와서 난민촌을 형성하는 설정도 흥미진진했다. 그 모든 다채로운 캐릭터들은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서 미처 완전히 정리되거나 삭제되지 않은, 좌절되고 망각된 우리 안의 욕망들의 총집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로 길들여지는 인간.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토록 방대한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야생의 갈증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성이 공존한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했던 것들의 잃어버린 가능성을 탐구한다. 우리의 바람직한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버려진 역겹고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그녀는 아브젝트(abject)’라고 불렀다. 슈렉은 바로 그 버려진 존재, 아브젝트를 코믹하게 구현해낸 성공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슈렉은 지상의 모든 남녀를 백마 탄 기사를 기다리는 공주공주를 구출하는 멋진 왕자로 육성하려는 동화의 낭만적 환상을 첫 장면에서부터 와르르 무너뜨린다.

 

 

옛날 옛적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었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첫 키스만이 이 저주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에 갇혀 있었고 무서운 불을 뿜는 용이 그녀를 지켰습니다.

많은 용감한 기사들이 그녀를 구철하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용의 성에서 기다렸습니다.

가장 높은 탑의 맨 위에서 그의 사랑과 키스를 기다렸습니다.

-영화 슈렉중에서.

 

 

 

 

슈렉은 뒷간에서 큰일을 보던 중 이 동화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를 쭉 찢어 휴지로 사용한다. 슈렉에게 그런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란 얼간이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슈렉은 자신을 스스로 악당의 자리, 괴물의 자리에 고립시킨다. 어차피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환영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할 존재이니 타인에게 사랑받는 통로를 아예 차단해버리고 세상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다쟁이 당나귀 동키는 세상의 냉대를 참다못해 스스로를 유배시킨 슈렉의 숨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존재다. 동키 또한 주인의 말을 잘 듣고 묵묵히 일하는 바람직한 당나귀가 되지 못하고 주인에게 버려진 존재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슈렉의 상처에 공감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중 그 누구도 장애, 금지, 권위 또는 법률과 맞서지 않고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반항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행복의 개인적 경험을 동반하여 나타나는 반항은 쾌락의 원칙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 소외 계층이 반항의 문화를 갖지 않고, 쾌락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쇼와 오락 등에 안주해야 할 때, 그들은 폭도가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박선영 역, 정신병 모친 살해 그리고 창조성, 아난케, 20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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