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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 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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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드리워놓은 감성의 그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뉴랜드는 엘렌의 집 앞에서 그녀의 집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현실 같군.” 이것은 가장 뉴랜드다운 방식이다. 환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뉴랜드는 환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기쁨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므로. 메이는 죽어서까지 그를 메이의 커뮤니티로 묶어둔다. 그가 메이의 이해에 감동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가 뉴욕 사교계의 아비투스를 드디어 완벽히 자기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토록 숨 막혀 하던 메이의 아비투스를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세포로 장기이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의 탁월함은 주관적인 감정까지 아비투스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감정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며, 감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이 고상한 귀족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우중충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메이에게는 불경한 감정이며 뉴랜드에게는 충격적인 감정이다. 개인의 흥분이나 동정심, 말할 수 없는 무의식까지도 감정의 사회학적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는 개개인의 말할 수 없는 욕망’, ‘표현되지 않는 욕망까지 상징적 권력의 동력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권력이란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 말한다. ,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루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고화된다. 알파걸, 엄친딸/엄친아,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을 상징하는 각종 별명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세대(88만원 받는 신입사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삼팔선(38세에 은퇴), 토폐인(토익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족), 취집(취업 대신 시집가기), 대오족(대학5학년생, 졸업을 미루는 학생)……. 이 모든 약자의 호명 또한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사회의 상징적 권력을 공고화한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문화권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지속될 수록 견고해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때, 누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질 때, 허리가 휘어지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뛸 것이라는 환상이 대중화될 때, ‘구별짓기의 문화적 파장은 더욱 사회 깊숙이 내면화된다.

 

우리는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투표한다. 우리는 모든 선거가 자유로운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비투스의 그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의식을, 무의식까지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조차도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지배계급의 논리에 따라 규격화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급 착시가 아닐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바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전달되는 권력 효과를 증명하는 개념이다. 단지 보수여당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결과적 행위만이 아니라 뉴타운 공약 여부에 따라 후보를 판단하는 유권자의 취향 자체가, 뉴스에 대한 일상적 무관심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며 투표일에 휴가를 떠나는 무관심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습관적 냉소라는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일상의 습속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추어 개인의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자각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군과 아군의 대립을 단지 보수 대 진보식의 커다란 구분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문화적 일상적 구별짓기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식과 강북식의 이분법도 있고 외제차와 국산차의 이분법도 있으며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이분법도 있으며 얼짱과 얼꽝식의 당혹스러운 구분도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하고 홍대 앞 클럽에서 출입자의 액면가로 입장권 배부 여부를 가리는 풍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걔는 나랑 친해’, ‘쟤는 나랑 안 친해식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구별짓기를 비롯하여 일상의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상징적 권력을 창조하기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냐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닫힌 선분을 만드는 모든 사소한 억압들과의 투쟁이라는 것을, 부르디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계급 배반이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아름다운 강남좌파, 노동자계급에게 음악과 회화와 그 모든 예술의 감동을 무료로 공급해주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구조조정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2080의 사회로 만든 신자유주의와 정면 승부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오늘도 이 모든 창조적 계급 배반의 상상 속 리스트를 채워보며 부르디외가 투쟁했던 현대사회의 새로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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