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한미디어, 사회를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금세 ‘루저’ 취급을 받는다. 아니,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루저’로 단죄한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은 단지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이유로 남친에게 연락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버린 20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학비를 모은 뒤 남은 돈으로 멋을 부려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새로 산 치마 한 벌에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혼자만의 자신감에 휩싸여 캠퍼스를 날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 소품의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잘’ 입기 위해 감각만큼 필요한 것은 생활의 여유라는 것을. 스물한 살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허영심이기 전에 소박한 순정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날, 남자가 여자의 옷맵시를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날 혼자 소주를 마셨던 남자는 여자가 잠적한 까닭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1~92쪽.
세련된 옷맵시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남친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소박한 본능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좌절해본 모든 여성들은, ‘잘 빠진’ 짝퉁 가방 앞에서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여본 적 있는 여성들은, 소설 속 이 여자의 말 못할 아픔을 이해할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는 귀족공동체의 승리를, 메이‘들’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으로 공동체의 순수를 엄호한다. 메이가 누리는 화려한 귀족풍의 의상과 웅장한 인테리어는 ‘우리’의 범주에서 그 어떤 일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의 제스처다. 엘렌의 환영만찬을 집단 보이콧했던 그들이 엘렌을 추방하기 위한 환송만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그들만의 순수를 사수하는 방식이다. 메이가 자아내는 티 없이 고운 순수의 이면에는 언제 ‘자기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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