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화 속 생물들이 모여든 곳
‘바람직한 주체’로 사회화되기 위해 현대인은 자기 안의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고 ‘나다운 것’의 경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적절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야생적 본능을 버려야 한다. 부패한 우유, 똥, 구토물, 시체들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하듯이 우리는 ‘한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억압하거나 배설해버린 욕망들’을 자아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추방하고자 한다. 크레스테바는 이렇게 문명화한 현대인의 자아, 그 경계바깥에 추방된 존재들을 ‘아브젝트’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개발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다채로운 욕망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억압된 것의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인간의 ‘부끄러운 욕망’은 무의식 속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는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기피하지만 실상 매일 접하는 것, 즉 더러운 오물이나 끔찍한 죽음처럼, ‘아브젝트’는 항상 우리의 또렷한 의식 주변을 배회하며 서성인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미 버려졌지만, 그렇게 버려진 아브젝트는 ‘바람직한 주체’의 경계를 위협하며 ‘난 아직 살아 있음’을 증언한다.
파쿼드 영주가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추방한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세속적인 삶에서는 전혀 실용성이 없어 보이는 ‘동화 속의 생물들’이다. 동화 속의 환상 따윈 이제 필요 없어! 오직 노동하고 생산하고 발전하는 문명만이 있을 뿐. 파쿼드의 왕국은 이 모든 ‘동화적 환상’을 철저히 ‘아브젝트’로 버려둔 채 독재자 파쿼드의 시선으로 재단된 바람직한 문명의 경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들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물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 피리 부는 아저씨, 피터팬, 피노키오, 일곱 난쟁이, 아기돼지 삼형제 등 수없이 많은 동화 속의 인물들과 동물들을 추방해버린다.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은 슈렉의 늪으로 잠입하여 거대한 난민촌을 형성한다. 평화롭고 안락한 슈렉의 은둔 생활에 최대 위기가 닥친 것이다.
추방되는 것은 과격하게 쫓겨나지만, 결코 다 제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유아의 경험 주변을 배회하며, 유아의 모호한 자아 경계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어떤 것이 단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추방된다는 것은 그것이 의식에서 전적으로 사라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깨끗하고 적절한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시에 의식적인 위협으로 남는다. 아브젝트는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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