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시시신을 죽이다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들 단호히 ‘No!’를 선언한다.
아시타카는 계속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다. 너를 구원할 순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운명 앞에 섰을 때, 운명 앞에 거만 떨지 않는 인간의 우직한 정공법이다. 나에겐 너를 구할 엄청난 능력은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겠다는.
인간들의 총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죽어가는 모로는 마지막으로 에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힘을, ‘들개의 딸’이었던 원령공주를 재앙신으로부터 구하는 데 쓰고 조용히 죽어간다. 모로가 참혹하게 죽어간 자리에서 아시타카가 원령공주를 구하는 동안, 에보시는 시시신을 찾아내 화승총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다들 잘 봐! 신을 죽이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쏘지 마요! 제발!”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필사적으로 에보시를 말리지만 에보시는 기어이 총을 쏘고 만다.
시시신의 목을 정조준하여 날려버리는 에보시. 그 순간 아름답고 풍성한 뿔로 무성하던, 시시신의 가녀린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비췻빛을 뿜어내는 ‘시시신의 체액’이 숲 전체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의 스토리가 멈춘 듯, 모두가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때,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시시신의 목을 노리던 사냥꾼은 재빨리 시시신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 미리 준비한 나무 상자에 담아버린다.
시시신의 체액이 거대한 숲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와 땅 위를 적시는 듯한, 고통스러운 환각을 느낀다. 대지를 뒤덮은 시시신의 체액에 닿으면 모두 죽는다며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사람들.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홍수에 숲의 모든 생물들은 살길을 찾아 숲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쟁’을 멈추고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갈 궁리에 바쁘다. 시시신의 체액은 천천히 촉수를 뻗어 자신의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액체는 단지 시시신의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참혹한 풍경은, 바로 시시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결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빠져나와 속절없이 흘러넘치는 듯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잘린 것은 시시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인간의 딸 원령공주를 키우고 시시신의 신변을 보호했던 들개들의 수장 모로. 이미 몸은 죽어 머리만 남은 들개 모로는 죽어서도 에보시를 향한 원한을 잊지 못해 그녀의 팔을 잘라 버린다. 그의 잘린 머리에 맞아 팔이 잘려버린 에보시는 그제야 광기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만행인지를 깨닫게 된다. 숲을 접수하려는 그녀의 야망은 곧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모든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한 에보시를 타타라 마을로 되돌려 보내려는 아시타카를 향해, 그녀 때문에 엄마 모로를 잃은 원령공주는 절규한다.
원령공주: 그 여자 내게 넘겨! 죽여 버릴 거야!
아시타카: 모로가 복수했어. 이젠 잊어…….
원령공주: 싫어! 너도 인간들과 한패야! 그 여자 데리고 썩 꺼져! (아시타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오지 마! 인간 따위 질색이야!
아시타카: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원령공주: 닥쳐! 난 들개야! 저리가!
아시타카: (원령공주를 포옹하며) 미안해……. 막으려고 최선은 다했어.
원령공주: (흐느끼는) 이젠 끝이야. 숲은 죽었어.
아시타카: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아 있잖아.
이때 시시신의 머리가 움직이며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없어진 머리를 찾는 몸과 없어진 몸을 찾는 머리의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머리가 움직인다! 머리가 몸을 부른다!” “시시신이 머리를 찾으러 왔어요! 이 액체에 닿으면 죽어요! 물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어요!” 아시타카는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시시신의 머리를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사냥꾼은 숲이 파괴되는 광경을 버젓이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상금에만 눈이 멀어 시시신의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
“햇빛에 닿으면 저놈은 끝이야! 보라고! 이제 시시신은 죽기 직전에 발광하는 저주의 신일뿐이야! 해만 뜨면 놈은 끝장이지!” 그러나 시시신의 체액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잘린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시시신에게 기도한다. “시시신이시여! 이제 머리를 가져가시오! 부디 진정하시오!” 그 순간 시시신의 목은 몸과 합체되고, 제 머리를 찾은 몸은 거대한 육신을 대지에 뉘이며,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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