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책Ⅱ②
의화권은 산둥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당시 산둥은 중국의 분할을 주장한 독일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후발 제국주의의 조급함으로 독일이 그악스럽게 나오자 의화권도 조직을 더욱 확대하고 명칭도 의화단으로 고쳤다. 급기야 그들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보다 먼저 급해진 것은 청 조정이었다. 서태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의화단은 그것을 계기로 톈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제는 의화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철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관청을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화북 일대로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제 서구 열강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버려두었다가는 공들인 탑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몰랐다. 열강은 일단 청 조정에 하루빨리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지 못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 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40년 전의 태평천국운동이라면 반란을 공공연히 표방했으니 당연히 진압 대상이었으나 의화단은 민간 단체였으니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조정의 일각에서는 의화단을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자는 주장도 나왔다. 고민하던 서태후는 서구 열강이 광서제에게 친정(親政)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자 즉각 결단을 내렸다. 서태후는 각국 공사관에 당장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고 각 지방에 의화단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아편전쟁 이래 40년 만에 다시 중국과 서구 열강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물심양면에 걸쳐 중국 민중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마찬가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의 상대는 유럽 8개국 연합군으로 전보다 더욱 막강했던 것이다. 유럽 연합군은 톈진과 베이징을 손쉽게 점령하고 쯔진청(紫禁城)을 약탈했다(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때 탈취되었다). 결국 청 조정은 또다시 백기를 들었다. 연패의 기록이 경신되면서 중국은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서구 열강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 통째로 집어삼키기에는 입이 너무 많아진 데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문화와 강력한 민중의 항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 베이징의 유럽 군대 태평천국운동에서도 보았듯이, 서구 열강은 평소에 서로 이해를 다투다가도 중국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데는 한 데 뭉쳤다. 사진은 의화단 진압을 위해 파견된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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