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대(光宗代)에 비롯한 과거제의 실시, 최충(崔沖)으로 대표되는 사학(私學)의 흥기, 예종(睿宗)ㆍ인종(仁宗)의 호학(好學) 등이 모두 이 문학유교에 힘입은 것이며, 고려의 문풍이 크게 떨치어 빛나는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을 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특히 광종(光宗) 9년에 실시된 과거제도는 후주(後周)의 귀화인(歸化人)인 쌍기(雙冀)를 지공거(知貢擧)로 하여 시험을 보인 것이 그 처음이거니와 이때의 과거는 제술과(製述科, 進士科)와 명경과(明經科)의 양대업(兩大業)이 있었고 잡과(雜科)로서 의업(醫業), 복업(卜業) 등이 있었다【『고려사(高麗史)」ㆍ「지(志)」, 권제(卷第)27, 과거(選擧)1】.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과시과목이 무엇이었느냐에 있다. 제술과(製述科)에 있어서는 시(詩)ㆍ부(賦)ㆍ송(頌)ㆍ시무책(時務策) 등 사장(詞章)이 주종이었으며 명경과(明經科)에서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시과목의 내용은 그 시기에 따라 다소의 출입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제술과(製述科)에는 사장(詞章)이 중심이 되었으며 양대업(兩大業) 중에서도 사장(詞章)을 과(課)하는 제술과(製述科)가 명경과(明經科)보다 훨씬 중요시되었다. 1032년에 새로이 실시된 국자감시(國子監試)【조선 시대의 진사시(進士試)】에 있어서도 과시과목은 모두 사장(詞章)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편향은 당시 사풍(士風)의 향방을 크게 자극하였던 것이며, 사장을 숭상한 고려 시대 문풍의 소유래(所由來)를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온전하게 시를 전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물로는 초기의 오학린(吳學麟)과 최승로(崔承老)에서 비롯하여 장연우(張延祐)ㆍ최충(崔沖)ㆍ최약(崔瀹)ㆍ이자량(李資諒)ㆍ이오(李䫨)ㆍ최석(崔奭)ㆍ박인량(朴寅亮)ㆍ김연(金緣)ㆍ최유선(崔惟善)ㆍ곽여(郭璵)ㆍ권적(權適)ㆍ이자현(李資玄)ㆍ인빈(印份)ㆍ김부식(金富軾)ㆍ김부의(金富儀)ㆍ정습명(鄭襲明)ㆍ고조기(高兆基)ㆍ최유청(崔惟淸)ㆍ정지상(鄭知常) 등에 지나지 않으며 이 가운데서도 시사(詩史)에서 문제삼을 만한 시인은 장연우(張延祐)ㆍ박인량(朴寅亮)ㆍ곽여(郭璵)ㆍ김부식(金富軾)ㆍ정습명(鄭襲明)ㆍ고조기(高兆基)ㆍ정지상(鄭知常)ㆍ최유청(崔惟淸) 등이 고작이다.
최언위(崔彦撝)와 같은 문장으로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나 『조석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금석문자(金石文字)만 남기고 있을 뿐, 그의 시편(詩篇)은 단편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사장학(詞章學) 200년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려초(麗初)의 시사(詩史)를 그토록 공허하게 한 것은 시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전승자에게 책임이 있다.
개인의 문집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후대인의 수습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초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 알려지고 있는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이 고려말기에 나타나고 있으며 그 내용도 소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도 조선초기에 이미 산일(散逸)된 것이 많았으며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동인지문(東人之文)』ㆍ사육(四六)은 선문집(選文集)일 뿐이다. 『십초시(十鈔詩)』는 기본적으로 당시선집(唐詩選集)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시작(詩作)으로는 견당유학생(遣唐遊學生)들의 시편(詩篇)이 거기에 몇 수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은 필사본(筆寫本)이 전하고 있거니와 내용이 빈약하여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선발책자는 모두 15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400년전 려초(麗初)의 시편(詩篇)이 온전하게 수습되기 어려웠을 것은 물론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