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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3장 - 소나기나 태풍이 한나절을 갈 순 없다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3장 - 소나기나 태풍이 한나절을 갈 순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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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希言自然.
희언자연.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
고표풍부종조,
그러므로
회오리 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驟雨不終日.
취우부종일.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孰爲此者? 天地!
숙위차자? 천지!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天地尙不能久,
천지상불능구,
하늘과 땅도 이렇게 오래 갈 수 없거늘,
而況於人乎!
이황어인호!
하물며 사람에서랴!!
故從事於道者:
고종사어도자:
그러므로
도를 따라 섬기는 자는 알아야 할 것이다.
道者同於道,
도자동어도,
도를 구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德者同於德,
덕자동어덕,
얻음을 구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失者同於失.
실자동어실.
잃음을 구하는 자는 잃음과 같아진다.
同於道者,
동어도자,
도와 같아지는 자는
道亦樂得之;
도역락득지;
도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同於德者,
동어덕자,
얻음과 같아지는 자는
德亦樂得之;
덕역락득지;
얻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同於失者,
동어실자,
잃음과 같아지는 자는
失亦樂得之.
실역락득지.
잃음 또한 그를 즐거이 얻으리.
信不足焉,
신부족언,
믿음이 부족한 곳에는
有不信焉.
유불신언.
반드시 불신이 있게 마련이니.

 

 

1. 자연을 명사화하지 말라(希言自然)

 

이 장은 죽간(竹簡)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백서(帛書)에는 아주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장은 장구의 해석에 있어서 심히 불편한 요소들이 많았다. 그런데 백서(帛書)의 출현은 이러한 불편한 요소들을 말끔히 제거시켜 주었다. 이 장에 있어서는 분명 왕본(王本)이 잘못 과대포장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自然)’이라는 표현이 노자에 나온 용례는 전부 다섯 번이다. 어느 경우에도 자연(自然)’을 서양언어의 명사적 개념(Nature)으로 번역할 방법은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모두 스스로 그러하다(It is so of itself)’는 기술에 불과하다. 그것을 명사화하여 주어나 목적어로 삼을 수가 없는 것이다.

 

 

17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하다 하는도다.
23 希言自然. 말이 없는 것이 스스로 그러하다.
25 道法自然.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51 夫莫之命而常自然. 대저 명령하지 않아도 항상 스스로 그러하다.
64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이리하여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노자에게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는 한결같은 용례인 것이다. ‘희언자연(希言自然)!’ 어리석은 대부분의 동ㆍ서의 역자들이, 우리나라의 졸렬한 한학자들이 모두 이를 번역하여 이른다. ‘자연은 말이 드물다(Nature is silent)!’ 그 얼마나 옹졸한 번역인가?

 

여기서 ()’라 함은 드물다는 뜻이 아니라 부정사적 의미인 것이다.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 함은 거대한 음은 소리가 드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음[天音]은 소리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것은 14에서 말한 바대로 聽之不聞, 名日希.’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드물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연을 명사화 해버리면, ‘말이 없는 것이 그린벨트이다라는 얘기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린벨트는 과연 말이 없는가? ‘자연(自然)’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특정한 명사적 대상을 지칭한 것이 아닌 것이다.

 

희언자연(希言自然)! 그것은 곧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함을 이른 것이다. 인간의 말()이란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유위(有爲)의 소산(所産)인 것이다. 유위(有爲)는 우리에게서 허()를 앗아간다. 무위(無爲)는 우리에게 허()를 극대화시킨다. 유위적 언어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허를 앗아가는 문명의 장난이다. 그래서 ()’로 연결되는 다음의 내용을 보라! 그 논리적 맥락의 필연성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소나기나 태풍이 한나절 갈 수 없다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표풍(飄風)’이란 거센 바람이요, ‘갑자기 일어난 광풍이다.(詩毛傳: 飄風, 暴起之風.) 그것은 왕필의 주대로 포악하고 질주하는 것[]이다.

 

 

飄風不終朝, 거센 바람 한 아침 마칠 수 없고,
驟雨不終日 드센 비 한 나절 마칠 수 없세라.

 

 

이것은 아마도 노자전 텍스트에서 가장 잘 인용되는 아름다운 구절 한 줄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할 때, 성날 때나, 화날 때나, 질주할 때나, 급하게 서둘 때나, 분노에 부르르 주먹을 움켜질 때나, 억울함에 하늘이 짓누르는 것을 느낄 때, 바로 이 싯구절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할 것인가?

 

이것은 자연(自然)현상이요, 자인(Sein)의 세계다. 그러나 그 자인이 곧 우리에게는 졸렌(Sollen)이다. 소나기는 한 나절을 마칠 수 없다! 광풍은 한 아침을 마칠 길 없다! 우리의 인생은 보슬비처럼, 산들바람처럼 살 때만이 장구(長久)할 수 있는 것이요, 그 허()를 보지할 수 있는 것이다.

 

소나기와 광풍은 곧 우리 삶의 허()의 부정이다. 그것은 천지(天地)의 정칙(正則)이다. 천지(天地)가 만든 광풍[飄風]이나 취우[驟雨]도 한나절을 갈 수 없는데, 어찌 우리 이 나약한 인생의 광풍이나 취우가 한 나절 이상을 갈까보냐?

 

孰爲此者, 天地!’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는 중()ㆍ서(西)의 번역이 드물다. 그러나 텍스트의 문제는 이 다음부터 시작된다.

 

 

3. 무엇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그걸 닮아간다(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여기 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에서 도자(道者)’가 중복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왕필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뜻에서 從事於道者에서 일단 끊고, 그 다음의 도자(道者), 덕자(德者), 실자(失者)를 종사어도자(從事於道者)의 내용을 부연하는 세 구절로 풀어 해석하였다. 그런

데 이 부분의 마왕퇴 백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故從事而

道者, 同於道,

德者, 同於德,

失者, 同於失.

 

나는 이 구절을 생각할 때 성경과 더불어 근 500년 동안 기독교세계를 지배해온 독일신비주의(German Mysticism)의 걸작,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71)예수를 모방하여(De imitatione Christi, The Imitation of Christ)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Imitation)이란 대상화되는 어떤 실체에 대한 흉내가 아니다. 모방이란 곧 융합이요, 실천이다. 우리 삶은 진리의 빛(Light of Truth)과 은총의 빛(Light of Grace)으로 되어있다.

 

이 양자는 분리될 수가 없다. 진리의 빛은 은총의 빛을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은총의 빛은 막연한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예수가 나에게서 대상화될 수 없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내가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내가 예수와 같아지는 것이다. 같아짐이 곧 이장에서 말하는 ()’이다. ()를 모방하는 자는 도()와 같아지고, ()을 모방하는 자는 덕()과 같아지고, ()을 모방하는 자는 실()과 같아지는 것이다. 왕필(王弼)의 텍스트는 도()와 덕()과 실()의 삼자(三者)를 동등하게 병렬(竝列)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이해이다. ()과 실()은 도()에 대하여 부차적인 것이다. 즉 그 근원적인 구조가 병열() 구조가 아니라 중층(重層) 구조인 것이다.

 

 

 

 

여기 덕()의 의미가 도()에 대하여 실()과 상대되는 것이라는 이 중요한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덕()은 도()의 득()이다. 그것은 도()의 실()에 대하여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백서(帛書)의 갑()ㆍ을()의 의미 맥락은 아주 명료하다.

 

()에 종사하는 자는 도()에 같아지고, ()에 종사하는 자는 덕()에 같아지고, ()에 종사하는 자는 실()에 같아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일 앞의 從事而()’가 덕자(德者)의 문장과, 실자(失者)의 문장에 다 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4. 도를 얻은 사람과 잃은 사람(同於道者, 道亦樂得之,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이 문장에서 바로 왕본(王本)은 도(), (), ()의 삼자(三者)를 병렬(竝列) 구조로 간주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실상 앞 단에서 말한 삼자(三者)의 구조를 여기서 진부하게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백서(帛書) ()ㆍ을본(乙本) 모두 명료하게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帛書甲 同於德者, 道亦德之.
同於失者, 道亦失之.

 

 

()에 같아질려고 하는 자, 즉 덕()을 모방하는 자는 도() 또한 그를 덕()하게 만들 것이요, ()에 같아질려고 하는 자, 즉 실()을 모방하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실()하게 만들 것이다. ()은 곧 득()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내용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이 명료해진다.

 

 

도를 얻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얻을 것이요,

도를 잃는 자는 도 또한 그를 잃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왕본(王本)에서는 , , 이 병렬되어 있는데 반해서 백서본(帛書本)에는 덕()과 실()의 주체가 그 상위개념의 도() 하나라는 것이다.

 

 

同於德者
德之

失之
同於失者

 

 

이러한 백서본(帛書本)의 이해야말로 노자의 도()와 덕()의 사상을 명료하게 만드는 위대한 선()이해 구조(Pre-Understanding)를 밝혀주는 것이며, 그동안 이 장에 얽혀있던 모든 고증가들의 잡설을 일격에 다 쓸어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노자이해의 유쾌한 한 도약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관한 한 왕본(王本) 텍스트는 별 신빙성이 없다. 백서본(帛書本)에 준하여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信不足焉, 有不信焉’, 이 구절이 백서(帛書)에는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17에 있어야 할 것이 여기 또 다시 착간(錯簡)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구절은 여기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信不足焉, 有不信焉에 대한 해석이 진부한 일반 맥락에서가 아니라 17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화시켜주는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3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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