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古之善爲士者, 고지선위사자, |
옛부터 도를 잘 실천하는 자는 |
微妙玄通, 深不可識. 미묘현통, 심불가식. |
세미하고 묘하며 가믈하고 통한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다. |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
대저 오로지 헤아릴 길 없어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
豫焉, 若冬涉川; 예언, 약동섭천; |
머뭇거리네 겨울에 살얼음 댓갈을 건너는 것 같고 |
猶兮, 若畏四隣. 유혜, 약외사린. |
쭈물거리네 사방의 주위를 두려워 살피는 것 같다. |
儼兮, 其若容; 엄혜, 기약용; |
근엄하도다 그것이 손님의 모습과 같고 |
渙兮, 若氷之將釋. 환혜, 약빙지장석. |
흩어지도다. 녹으려하는 얼음과 같다. |
敦兮, 其若樸. 돈혜, 기약박. |
도탑도다. 그것이 질박한 통나무 같고 |
曠兮, 其若谷. 광혜, 기약곡. |
텅비었도다 그것이 빈 계곡과 같네. |
混兮, 其若濁, 혼혜, 기약탁, |
혼돈스런 모습이여 그것이 흐린 물과도 같도다! |
孰能濁以靜之徐淸? 숙능탁이정지서청? |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
就能安以久, 숙능안이구, |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
動之徐生? 동지서생? |
천천히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
保此道者不欲盈. 보차도자불욕영, |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
夫唯不盈, 부유불영, |
대저 오로지 채우려하지 않기에 |
故能蔽不新成. 고능폐불신성. |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새로이 이루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다. |
1. 판본의 문제(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이 장의 느낌은 한 편의 시인 동시에, 또 『노자』라는 책을 쓴 사람의 인격적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리얼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 개념적이 아니면서, 아주 개인의 삶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는 어떤 수양론적 멧세지를 담고 있는 이런 장이야말로 『노자』라는 책의 고층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장은 죽간(竹簡) 갑본(甲本)의 다섯 번째에 실려있다. 마지막의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이란 구절만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도 죽간(竹簡)에는 없어도 백서(帛書)에는 나타나고 있음으로 왕필(王弼)의 첨가라고 볼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위사자(爲土者)’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하여, 부혁본(傅奕本)이나 기타 많은 판본에 의거하여 ‘위도자(爲道者)’로 바꾸어 해석하였다. 그리하면 선위도자(善爲道者)는 ‘도를 잘 실천하는 사람’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백서본(帛書本)이 나오면서 이러한 판본의 문제가 입증되기에 이른 것이다. 백서본에는 ‘고지선위도자(古之善爲道者)’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필본의 ‘선위사자(善爲士者)’는 ‘선위도자(善爲道者)’로 바꾸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일이 터진 것이다. 즉 죽간(竹簡)이 나온 것이다. 죽간(竹簡)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죽간(竹簡)에는 또 다시 왕본(王本)과 동일하게 ‘선위사자(善爲士者)’로 되어 있는 것이다.
王本 | 古之善爲士者, |
帛本 | 古之善爲道者, |
簡本 | 長古之善爲士者, |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노자』라는 텍스트의 전승문제에 관하여 확실한 새로운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마왕퇴 백서본(帛書本)의 발견으로 인하여 왕본(王本)의 가치를 저하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백서본과 부혁본(傅奕本, 唐나라 때 성립한 것으로 『道藏』속에 보존됨)은 거의 동일한 전승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왕본(王本)은 또 다른 전승의 소산이며, 백서본에 근거하여 왕본(王本)을 후대의 발전으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선위사자(善爲士者)’에 관하여 왕본(王本)과 간본(簡本)이 일치한다고 해서 왕본(王本)이 간본(簡本)과 동일한 전승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왕본(王本) 텍스트가 백서(帛書) 텍스트보다 보다 고형(古形)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2. 사(士)란 의미의 역사적 흐름
‘위도자(爲道者)’는 ‘도를 구현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후대적 개념이다. 여기 『노자』의 고층대 텍스트에서는 분명히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사(士)’는 자형(字形)으로 보면, 갑골문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후대의 금문에서 ‘도끼’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士)에 대한 해석의 역사는 다양하다. 그것은 본시 평범한 ‘사내(『시경』의 용법)를 의미하는 데서 출발하여, ’전사(戰士)‘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또 사대부(士大夫)와 같은 특정 계급으로 발전하였다가 또 우리말의 ‘선비’에 해당되는 지적인 리더그룹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지기도 하였다(션비士의 어원문제, 崔玲愛의 논문, ‘中國古代音韻學에서 본 韓國語語源問題’, 『도올논문집』 [통나무, 1991] 참고).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는 아주 직역하면 ‘예로부터 아주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국(戰國)시대에 있어서 훌륭한 ‘전사’의 이미지는 이상적 인간(리더)의 이미지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말하는 이상적 인간상 속에는 반드시 전사(Warrior)라는 개념이 들어있는 것과도 같다. 폴리스(도시국가)야말로 전국(戰國, Warring State)이었던 것이다.
‘미묘현통(微妙玄通)’은 꼭 『주역(周易)』의 ‘원형이정(元亨利貞)’처럼, 노자의 인간상의 대표적 특징을 묘사하는 네 개의 형용사적 개념일 수 있다. 미(微)는 이미 14장에 나왔고, 묘(妙)와 현(玄)은 제1장에서 선보인 것이다. 통(通)은 백본(帛本)과 간본(簡本)이 모두 ‘달(達)’로 쓰고 있다. 통(通)과 달(達)은 요즈음의 우리말에 ‘통달한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대로, 비슷한 두 개의 개념이다. 통(通)하면 달(達)하고, 달(達)하면 통(通)하는 것이다. 통(通)은 『주역(周易)』 「계사」의 표현을 빌리면 ‘감이수통(感而遂通)’의 통(通)이다. 즉 감통(感通, 느끼어 통한다)의 뜻이다. 그것은 우주적 감통(Cosmic Prehension)의 뜻이다.
예로부터 정말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은, 즉 위대한 리더들은 아주 미세하고 오묘하고 그윽하고 통달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격의 깊이가 너무도 깊어(深, too deep to be apprehended)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병가적(兵家的) 표현일 수도 있다. 제갈공명의 작전적 깊이를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다.
3. 빤할 빤자의 세상
심불가식(深不可識)! 이 표현이 간본(簡本)과 백본(帛本)이 모두 심불가지(深不可志)로 되어 있다. 지(志)와 식(識)은 상통(相通)한다. 지(志)도 의식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불가지(不可志)란 의식의 지향성 속에 포착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이 깊어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반대로 물이 얕으면 소리가 시끄럽다. 노자는 얕은 물이 아니다. 깊고 깊어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은 물이다. 우리는 얕은 20세기를 살아왔다.
데카르트가 ‘clear and distinct’를 말한 것은 심불가식(深不可識)에 대하여 ‘명료하고 뚜렷한’ 인식을 과학적 인식의 제1원리로 내걸은 것이다. 사실 20세기를 통(通)하여 우리는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어떻게 하면 얄팍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너무 깊으면 잴 수가 없고, 또 계측할 수 없는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모두 헤아릴 수 있도록 얕고, 얇고, 명료하고, 맑고, 뚜렷한 것만을 우리의 20세기는 지향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모두 얄팍해져 버렸다.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들이 모두 빤할 빤자의 인간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빤할 빤자의 인간들의 특징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또 다시 자기처럼 빤할 빤자의 인간들인 것처럼 파악한다는 것이다. 빤할 빤자의 척도로써 모든 것을 빤할 빤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빤할 빤자로 비판하고 판단을 내릴 뿐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빤할 빤자의 인간이 되어갈 뿐이다.
그들은 ‘심불가식(深不可識)’의 세계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여기를 찌르고 들어가면 저켠에 우뚝 서있고[瞻之在前, 忽焉在後] 저기를 쑤시고 들어가면 이켠에 우뚝 서있는, 신출귀몰하는 불가식(不可識)의 인격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인간의 헤아림으로 다 헤아릴 수 있고, 그 무엇이 남지 않는 인간을 우리는 체도자(體道者, 도를 체득한 사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반면을 동시에 포용하는 다면적 인격을 너무도 상실하여만 온 것이다. 이제 21세기에는 좀 ‘심불가식(深不可識)’한 인간들을 우리 역사도 배출시켜야 하지 않을까?
‘강위지용(强爲之容)’이란, 불가사의(不可思議), 심불가식(深不可識)한 세계를 언어적으로 개념적으로 형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억지로 형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强)’은 ‘억지로’의 뜻이다. 억지로 형용할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 분석이나, 어떤 실체적 대응이 아니다. 결국 알레고리적인 사태를 나열하는 것이다. 이 장은 그러한 알레고리적 사태를 예언(豫焉)ㆍ유혜(猶兮)ㆍ엄혜(儼兮)ㆍ환혜(渙兮)ㆍ돈혜(敦兮)ㆍ광혜(曠兮)ㆍ혼혜(混兮)라는 일곱 개의 감탄사로 해서 나열하고 있다. 하나의 아름다운 시라 해야 할 것이다.
4. 두려움이란 존재의 여백이자 포용의 여지다(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예언(豫焉)’의 예(豫)는 문자그대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뜻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살얼음 덮인 냇갈 앞에서 주저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좀 노자적 인격의 느낌이 다가올 것이다. 노자적 인간은 똘똘하고 명석하고 판단력이 빠른 인간이 아니다. 아둔한 듯이 보이고 우물쭈물하는 듯이 보이고 흐리멍텅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노자의 흐리멍텅함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명석ㆍ판명성을 포용하는 사태임을 망각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유혜(猶兮)’의 유(猶) 역시 일종의 ‘원숭이’를 뜻하는 글자다. 원숭이는 겁이 많다. 주변을 살피기를 잘하고 두려워하기를 잘한다. 유(猶)의 이미지는 여기서 ‘외사린(畏四隣,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과 관련되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한 표현은 역시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란 위기적 상황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는 두려움이란 양면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려를 뜻한다. 두려움은 존재의 여백이요, 포용의 여지다. 두려움은 남김이다.
‘엄혜(儼兮)’는 역시 근엄한 모습이다. 이 근엄성은 여기 ‘손님(客)’이란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왕본의 용(容)은 객(客)의 오사(誤寫)로 간주된다. 손님은 항상 주인(主)과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개념이다. 노자적 인간은 주인이 아니요, 손님이다. 손님은 조심스럽다. 자기가 주관해서 일을 도모하지 않기에 에러의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손님은 스스로 그러한 사태의 추이에 자신을 맡긴다. 그것을 자기의 주관에 따라 조작하려하지 않는다. 손님의 궁극적 의미는 이것이다. 우리 인생은 천지자연에 대한 하나의 손님인 것이다. 건곤의 무대에 던져진 하나의 손님인 것이다. 손님은 손님다웁게 왔다 가야하는 것이다. 손님이 주인인척 모든 것을 주관하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5. 통나무처럼 흐린 물처럼
‘환혜(渙兮)’의 환(渙, 녹아 흐트러질 환)은 끓는 물에 던져진 얼음덩어리의 모습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 얼음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바로 ‘석(釋, 풀린다)’이다. 우리가 보통 ‘해석한다’는 것도 엉켰던 것이 풀린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 환(渙)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노자철학의 근원적인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노자철학 그 자체가 하나의 해체요, 노자가 말하는 인격 그 자체가 하나의 해체인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디컨스트럭션은 컨스트럭션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디컨스트럭션 그 자체가 하나의 컨스트럭션(construction)이다. 해체가 하나의 허(虛)로서 전체의 컨스트럭션(구성)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돈혜(敦兮)’의 돈(敦, 돈독하다)은 ‘박(樸, 통나무)’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통나무’는 기(器)로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통나무란 존재(存在)의 가능태이다. 통나무가 조각되어 온갖 그릇이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함장하는 상태가 곧 ‘통나무’이다. 통나무는 돈독하다. 통나무는 도타웁다. 통나무는 질박하다. 여기서 도타웁다[敦兮]는 뜻은 결국 모든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격의 위대성도 어떠한 그릇으로 규정될 수 없는, 그릇 이전의 통나무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한 그릇으로 판명이 되고 나면 그 인간은 매력이 사라지고 만다. 빤할 빤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용(用, 쓰임)을 뛰어 넘는 원초적 가능성의 다면성을 우리 인격은 계속 보지해야 하는 것이다.
‘광혜(曠兮)’는 넓고 또 텅 빈 모습이다. 이 광(曠)이 곡(谷, 계곡)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이제 곡신불사(谷神不死) 장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잠깐 곡신불사(谷神不死)를 해석하고 있는 왕필주를 잠깐 한번 들여다 보자 !
계곡의 하느님이란 계곡의 텅 빈 중앙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계곡이 없다.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거꾸로 올라감도 없고 거스림도 없다. 자신을 낮추면서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함을 유지하면서도 시들지 않는다. 계곡이 바로 이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아~ 그 얼마나 지극한 물체인가!
谷神, 谷中央無谷也. 無形無影, 無逆無違, 處卑不動, 守靜不衰, 谷以之成而不見其形, 此至物也.
‘혼혜(混兮)’와 탁(濁, 흐린 물)의 이미지는 이미 혼돈 신(神)의 고사에서 충분히 해설하였음으로 쉽게 그 풍부한 그림들을 머리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리고 노자적 인생관을 얘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한 구절은,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흐린 물의 비유다.
6. 나는 탁류이기에 탁류 속에 살리라(孰能濁以靜之徐淸)
나는 이 말을 생각할 때, 요즈음은 백담사에 기거하고 계신 중광(重光) 스님을 머리에 떠올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광스님과 오랜 교분을 맺어왔다. 얼마 전에도 백담사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서로 먹물장난하고 서로 시 쓰고 유쾌하게 깔깔대고 웃어 제키고, 돌아왔다.
왜 중광스님은 ‘걸레스님’인가? 그는 인생의 어떤 계기에 ‘걸레’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 걸레의 의미는 바로 이 노자(老子)의 15장 이 구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혼탁한 모습을 지녀왔다. 옛 성인들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옛날에는 이러이러했는데 지금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할 때, ‘지금’과 관련된 모든 언급이 예외 없이 부정적이다. 이 말은 곧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혼탁했고 개탄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토피아(Utopia)는 역사에, 인간세에, 단 한순간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단지 유토피아(Utopia)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의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혼탁한 세상은 어떻게 맑게 하는가?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한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한 줄기의 맑은 샘물을 생각한다. 한 줄기의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면 그 샘물로서 점차 흐린 물이 맑아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물리적 사태로서 두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에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흐린 물[濁], 그리고 그 속의 나는 맑은 샘물[淸], 우선 이 따위 2분법이 인간세상 이치에는 적용될 수가 없다. 흐린 물과 맑은 물의 2원적 경계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과연 사회적 탁류속에 있는 내가, 나 홀로 고립적으로 청류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어부사(漁父辭)」)?
걸레는 걸레이다. 걸레는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걸레는 자신을 더럽히면서 주변을 깨끗하게 만든다. 나의 깨끗함과 고고함이 이 사회를 깨끗하고 고고하게 만드는 유례는 없다. 나의 깨끗함과 고고함 자체가 이 사회의 더러움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너 자신을 먼저 흐리게 만들라!
그리고 자신의 흐림으로 탁류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탁류 그 자체를 가라 앉혀라!
그리하면 너와 네 주변이 같이 깨끗함을 얻으리라!
바로 예수의 생애도 십자가를 얽어졌다는 것은 곧 자신을 탁류로 만든 것이다. 예수가 자기만을 세상의 탁류에 대한 청류로 규정했다면 오늘의 예수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더불어 술 마시고 더불어 발을 씻고, 더불어 화내고 더불어 싸웠다. 그리고 강도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오늘 우리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우리 20세기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악마와 천사라고 하는 얄팍한 기독교적 사유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 윤리적 2원성이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그래서 죄는 너의 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은 모두 너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나는 그 죄악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너를 저주하노라! 그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과연 우리 민족은 구원을 얻었는가? 20세기 기독교 선교사의 결론이 무엇인가? 거대한 교회건물, 기도원에까지 수천만원짜리 코트를 입고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어리석은 여인들! 그것이 우리 20세기 기독교 선교사, 순교사의 총결이었던가?
7. 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지 않는다(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이 대목은 전통적으로 고증학적 논란이 많았던 대목인데, 이 부분이 착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 대목이 죽간(竹簡)에는 빠져있다.
그렇다면 착간이라는 설(說)이 정당한가? 그렇지는 않다. 백서본(帛書本)에는 이 부분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왕본(王本)의 현체제가 그렇게 함부로 구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백서(帛書)는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우선 죽간(竹簡)에 이 구절이 빠져 있어도, 그 앞에 ‘보차도자 불욕영(保此道者, 不欲盈)’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음으로 결코 이 내용을 의미적으로 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번 죽간(竹簡)에서 새롭게 읽어지는 사실은 ‘영(盈)’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다. 죽간(竹簡)에는 ‘영(盈)’자가 ‘정(呈)’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王本 | 保此道者, 不欲盈. |
簡本 | 保此道者, 不欲尙呈. |
죽간(竹簡本)에 의하면 이 구절의 뜻이 이와 같다: “이 도를 잘 보존하는 사람은 드러나기를 숭상하지 않는다.”
여기 ‘이 도를 보존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도를 자각하여 실천하는 사람이다. 불교에도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여 사소한 논쟁들이 끊이지 않지만, 노자철학(중국 토착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깨달음의 시점과 무관하게 인간의 수행이란 항상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차도자(保此道者)’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도(道)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자는 ‘불욕(不欲)’하게 되면, 자신의 허(虛)를 채우려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가 되고, ‘불욕상정(不欲尙呈)’하게 되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간의 발견으로 후자의 의미가 노자의 오리지날한 맥락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8. 낡음과 늙음에 대해 받아들이다
그런데 노자 전문가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구절은 최후의 ‘능폐불신성(能蔽不新成)’이라는 구절이었다. ‘능히 낡아빠질 수 있고 새로 이루지는 않는다’라는 의미가 왠지 부정적이고 나른하고 그 말끔한 맥락이 닿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여기 저기 출전을 대어 이것은 ‘능폐이신성(能蔽而新成)’의 오사(誤寫)라고 주장해왔다. 즉 ‘불(不)’자는 ‘이(而)’자를 자형이 비슷해서 잘못 전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뜻은 보다 근사하게 된다. ‘항상 자신을 낡게 할 수 있음으로 새롭게 생성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고증가들의 고증이 맞았는가? 백서의 출현은 이렇게 쓸데 없이 자기의 좁은 소견에 따라 원문을 개작하는 고증가들의 장난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었나를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王本 | 故能蔽不新成. |
帛乙本 | 是以能敝而不成. |
자구의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의미의 변화는 전혀 없다. 즉 아니 不자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로써 왕본(王本)의 판본이 얼마나 정확한 진실을 보존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자신을 낡게 할 수 있고 새롭게 이루지 아니한다’는 ‘약기지 강기골(弱其志, 强其骨)’만 한번 연상해도 쉽게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우주의 객(客)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정당하게 낡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지 아니한다. 어차피 우주의 엔트로피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증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낡아버리는 것이다. 그 낡음에 대하여 무리하게 뜻을 세워 유위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얼굴이 늙는다고 성형수술을 하는 어리석은 여자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얼굴이 더 폭삭 삭아버리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는 것을 여기서 ‘불신성(不新成)’이라 표현한 것이다. 여인의 젖가슴이 납작하다고 수술해서 그 속에 프라스틱 젤라틴을 쑤셔넣고 산다니! 참 이런 흉칙한 의술을 과연 과학의 진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신생(新生)’인가? 이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생각말자! 21세기는 낡게 태어날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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