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4장 - 과시하려 하는 군더더기 행동을 삼가라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4장 - 과시하려 하는 군더더기 행동을 삼가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09:19
728x90
반응형

 24

 

 

企者不立,
기자불립,
발꿈치를 들고 서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跨者不行.
과자불행.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
자현자불명,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自是者不彰,
자시자불창,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自伐者無功,
자벌자무공,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自矜者不長.
자긍자부장.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其在道也,
기재도야,
이것들은 도에 있어서는
曰餘食贅行.
왈여식췌행.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 한다.
物或惡之,
물혹오지,
만물은 이런 것을 혐오한다.
故有道者不處.
고유도자불처.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자는 처하지 아니하리니.

 

 

1. 뽐내려 애쓰는 것과 뒷꿈치를 들고 있는 것(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기자불립(企者不立)! 참으로 유명한 노자의 한 구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능하신 외할아버지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다.

 

우리네 인생 속엔 이런 노자의 이야기들이 삶 속에 절로 그러하게 사무쳐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로 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발꿈치를 들어올리는 것은 유위다! 발꿈치가 편안하게 땅에 닿아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추세다.

 

 

 

 

기자(企者)란 무엇인가? 발꿈치를 들어 올리는 사람, 타인위로 군림하고 싶어 애쓰는 사람, 뭔가 남보다 높아지고 싶고, 남보다 돋보이고 싶고, 남보다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발꿈치를 들어 올리는 사람! 이 사람들은 결코 발꿈치를 들어올린 상태를 지속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폭풍이 한 아침을 불지 못하고 소낙비가 한 나절을 내리지 못하는 것[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과 같다. 스스로 그러하게 입 다물고 침묵하느니만[希言] 같지 못한 것이다.

 

기자(企者)와 같은 이미지의 반복으로 과자(跨者)’가 나온다. 과자(跨者)는 옆으로 가랭이를 벌리는 것도 되겠지만, 앞뒤로 가랭이를 꽉쫙 벌리면서 활보(闊步)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그것 또한 뽐내며 과시하는 것이다. 기자(企者)와 과자(跨者)의 이미지는 그 다음에 나오는 자현자(自見者), 자시자(自是者), 자벌자(自伐者), 자긍자(自矜者)의 추상적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집약한 것이다. 기자(企者)는 수직적 이미지라면 과자(跨者)는 수평적 이미지라 말할 수 있다. 기자(企者)는 이상(理想)이 너무 고원하고 과자(跨者)는 야심(野心)이 너무 크다고나 할까?

 

 

企者 跨者
발꿈치를 들어 올리는 사람 가랑이를 쫙 벌린 채 활보하는 사람
타인에 군림하려 애쓰는 사람 뽐내며 과시하는 사람
수직적 이미지 수평적 이미지
理想이 너무 고원함 野心이 너무 큼
추상적 모습: 自見者, 自是者, 自伐者, 自矜者

 

 

 

2. 과시하려 하는 군더더기 행동을 삼가다(其在道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그런데 이 장은 죽간(竹簡)에는 안 나타나지만 백서(帛書)에는 공덕지용장(孔德之容章) 다음, 곡즉전장(曲則全章) 앞에 왕본(王本)과 약간 순서를 달리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텍스트의 한 문제가 있다. 기자불립(企者不立)이 취자불립(炊者不立)으로 되어 있고, 과자불행(跨者不行)이 없는 것이다.

 

 

王本 企者不立, 跨者不行.
帛書 甲 炊者不立.

 

 

취자불립(炊者不立)’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자불립(企者不立)’보다 오히려 추상적이고, 다음에 나오는 사구(四句)를 포괄적으로 담는 내용이다. 기자불립(企者不立)과 같은 메타포가 아니다.

 

 

허풍을 잘 떠는 놈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놈이 아니다.

炊者不立.

 

 

아마도 내가 생각키에 취자불립(炊者不立)’이보다 오리지날한 텍스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취자불립(炊者不立)을 보다 재미있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기자불립(企者不立)’으로 말장난(일종의 펀, pun)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불립(企者不立)’의 물체적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대구(對句)로서 과자불행(跨者不行)’첨가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변천에 있어서 꼭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보다 앞서는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이 깨지는 것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메타포가 추상적인 언술보다 더 고도의 지적 유희일 수가 있는 것이다. 기자불립(企者不立)은 참으로 양보할 수 없는 명구인 것이다.

 

여태까지의 고증가들이 여식췌행(餘食贅行)’의 췌행(贅行)을 여식(餘食)과 의미를 병치시키기 위해 모두 췌형(贅形)’으로 해석했다. 췌형(贅形)이란 찌꺼기 음식[餘食]에 대해 군더더기 살더러운 종양이나 사마귀류가 될 것이다.

 

그런데 백서(帛書)는 그것이 분명히 췌행(贅行)’임을 보여 준다. 텍스트는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상책이다. 가벼운 장난들을 해서는 아니 된다. ‘췌행(贅行)’은 문자 그대로 군더더기 행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현(自見, 스스로 드러내고), 자시(自是, 스스로 옳다하고), 자벌(自伐, 스스로 뽐내고), 자긍(自矜, 스스로 으시대다)하는 행위가 모두 췌행(贅行, 군더더기 행동)인 것이다. 이는 모두 쟁()의 세계요, 부쟁(不爭)의 무위(無爲)가 아니다.

 

이러한 여식췌행(餘食贅行)은 만물이 꺼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에게 암을 유발시키는 사태인 것이다. 우리는 암()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암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암은 암의 약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실존의 책임이다. 자현(自見), 자시(自是), 자벌(自伐), 자긍(自矜)하고 경쟁사회에서 지나치게 기과(企跨)하려 하면 결국 암에 걸려 죽게 되는 것이다. 유도자(有道者)들이 그러한 암에 처할 리가 없는 것이다. 도가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有道者不處]!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4 / 노자한비열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