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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6장 -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라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6장 -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라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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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重爲輕根,
중위경근,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靜爲躁君.
정위조군.
안정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
是以聖人終日行,
시이성인종일행,
그러하므로
성인은 종일 걸어다녀도
不離輜重;
불리치중;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고,
雖有榮觀,
수유영관,
비록 영화로운 모습속에 살더라도
燕處超然.
연처초연.
한가로이 처하며
마음을 두지 않는다.
柰何萬乘之主,
내하만승지주,
어찌 일만 수레의 주인으로서
而以身輕天下?
이이신경천하?
하늘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오?
輕則失本,
경즉실본,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躁則失君.
조즉실군.
조급히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

 

 

1. 가벼워지길, 고요해지길(重爲輕根, 靜爲躁君)

 

이 장의 내용은 평이하다. 간본(簡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백본(帛本)에는 고스란히 실려있다. 왕본(王本)과 대차가 없다.

 

The heavy is the root of the light.

The tranquil is the lord of the hasty.

 

(, 가벼움)과 중(, 무거움), (, 조급함)와 정(, 안정됨)의 대비적 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노자철학의 가치관 속에서 더 뿌리[]가 되고 머리[]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은 명백하다. 이 구절에 관해서는 역시 왕필의 주해가 일품이다.

 

 

대저 사물의 일반상식이란,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실어나를 수 없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진압할 수 없다. 걸어가지 아니하는 자가 걸어가는 자를 부릴 수 있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자가 움직이는 자를 제어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무거운 것은 반드시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凡物, 輕不能載重, 小不能鎭大. 不行者使行, 不動者制動. 是以重必爲輕根, 靜必爲躁君也.

 

 

여기 마지막의 ()’의 의미에는, 평상적 정치적 의미에서의 임금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임금(군왕)의 무위의 치세는 걸어가지 않으면서 걸어가는 자를 부리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의 본질적인 의미 맥락은 단순히 치세철학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가치 전반에 적용되는 맥락임으로 나는 그냥 그 추상적인 의미를 살려 머리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의 머리의 의미에는 수장(首長)의 뜻도 있고, 모든 질서의 벼리라는 뜻도 있고, 근원, 으뜸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2. 수레를 타고 여행 중엔 짐수레를 멀리하지 않는다(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여기 치중(輜重)’이라는 의미가 수레[]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이 치중을 보통 짐수레'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여기 성인종일행(聖人終日行)’()’은 걸어다닌다는 뜻이 아니고 수레를 타고 가는데, 먼 길을 갈 때는 성인이 타고 가는 승객차 앞뒤로 반드시 짐차가 같이 따라가게 마련이므로 그 짐차를 멀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수레로 여행을 갈 때에, 그 여행을 가능케 하는 모든 무거운 물자들이 짐수레에 실려있으므로, 그 짐수레를 멀리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신중한 태도를 여행 중에 견지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만약 전쟁 중의 행군(行軍)대열이라면 더욱 더 그 물자수송의 짐수레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만큼 치중(輜重)’근본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행군대열의 근본이 치중에 있다는 것이다.

 

백서(帛書)는 갑()ㆍ을본(乙本)이 모두 성인(聖人)이라는 주어가 군자(君子)’로 되어 있다.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편에 인용된 것도 군자(君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왕본(王本)성인(聖人)’은 후대의 찬개(撰改)로 보인다. ‘군자(君子)’가 원래 문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갑본(甲本)不蘺()其甾()으로 되어 있고, 을본(乙本)不遠其甾()으로 되어 있다.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나, ‘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의미상 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3.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수레대열의 문제로 해석하면 별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 군자종일행(君子終日行)’걸어다닌다로 해석하고, ‘불리치중(不離輜重)’등에 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로 해석하는 것이, 그 실제 정황의 적합여부를 떠나, 보다 그 소박하고 리얼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준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하루 종일 걸어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예수는 외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11 : 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예수는 여기서 해방의 논리를 말한다. ‘무거운 짐이란 율법에 얽매여서 사는 사람들의 멍에다. 그것은 모든 율법적 타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명령과 규례의 멍에 대신에 사랑과 믿음과 의로움의 멍에를 선포한다. 사랑은 무거운 짐도 가볍게 한다. 사랑은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에게 휴식과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무거운 짐을 걺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는 율법에 구속된 유대인들을 향하여 해방의 기쁜 소식을 외치고 있지만, 노자가 말하는 군자(君子)나 성인9聖人)은 이미 해방된사람들이다. 이미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와진 인간들이다. 해탈된 인간들일수록 무거운 멍에를 지닐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를 타고 가볍게 붕붕 날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희노애락의 수고로운 삶속에 그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과학적 신비의 형이상학적 명상으로 훨훨 날아다닐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 상식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과학의 무거운 짐을 질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쉬운 해결은 금물이다. 무거운 짐을 질 줄 아는 자만이 가벼운 해방의 논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함이다. 쉽고 가벼운 것부터 생각하려 하지 말고 어렵고 무거운 것부터 실천해가야 할 것이다. 가볍게 하늘을 붕붕 날아다닐 생각을 하지 말고, 무거운 짐을 지고 한발자욱 한발자욱 기나긴 땅의 여정을 감행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동양의 학문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학도들로부터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적 사유를 구현하는 자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자의 논리를 철저히 터득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한발자욱을 옮기더라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생각부터 하지 마라! 비록 그대가 해탈의 지혜를 얻었다 할지라도 이 진속(塵俗)의 무거운 구원의 짐부터 겪어질 줄 알라! 세상을 일시에 구원할 수 있는 수학공식을 다 풀어냈다 할지라도 오늘 여기 하루의 실천의 짐은 무겁고 또 무겁기만 하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4. 사회의 리더들에게 보내는 노자의 한 마디(雖有榮觀, 燕處超然)

 

영관(榮觀)’영화로운 모습이다. 하상공(河上公)은 이것이 임금이 사는 궁궐의 모습이라고 주를 달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군(, 임금)의 삶의 태도에 관한 구체적 이야기로 푼 것이다. 하여튼 노자철학이 본시 일반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요, 사회의 치자(治者, ruler), 군주(君主, lord), 즉 리더(leader)의 삶의 가치관을 설()

것이라 할 때 이러한 맥락은 설득력을 갖는다. 결국 이 세계의 질서와 평화는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모든 리더들의 올바른 생각과 비젼에 매달려 있다고 중국고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관망하였던 것이다.

 

본절의 연처(燕處, 한가로이 처한다)’, ‘초연(超然, 초연하다)’ 등의 표현은 우리 현재의 일상언어에 살아 있는 의미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 실상인즉,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연거(燕居)니 초연(超然)이니 하는 말들이 바로 노자의 이 말에 출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정치계의 수장들이나, 재벌의 영수들, 그리고 모든 프로펫셔날(professional)의 리더들, 그리고 포퓰라(popular)한 연예계나 체육계의 스타들, 모두 영관(榮觀, 영화로운 모습) 속에서 살고 있다. 초굉(焦竤)은 영관(榮觀)분화지관야(紛華之觀也, 화사하게 치장을 한 모습)’이라고 주를 달았다. 이러한 리더들일수록 그 영화로운 모습에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바로 영화로운 모습 속에 살지언정 그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超然)하게 한가롭게 지내야[燕處]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매우 중요한 노자의 가르침이다.

 

 

5. 정치를 꿈꾸는 이에게 던지는 노자의 메시지

 

누구든지 그대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5년 단임제를 취하고 있다. 5년 단임제라는 것이 모든 행정을 연속적으로 정강정책을 세워 끌어가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 비판도 있다. 사실 4년 중임제가 더 이상적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가 된 것은 역대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너무도 끔찍하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기에, 국민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들만 골라서 많이 했기에, 그리고 그들의 존재의 도덕성이 너무도 없어서 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도 징하고 징그럽고 지겨웁고 꼴보기 싫은 것이었기에 아예 그 반작용으로 ‘5년 단임제라는 것으로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5년 단임제라는 제도적 사실 자체가 역사적으로 우리국민이 우리사회의 정치적 리더를 바라보는 부정적 가치관을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부정적 가치관을 상쇄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져야만 한다는 역설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 누구가 과연 그 대통령이라는 영관(榮觀)의 자리에서 그 영관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히 연처(燕處)하였는가? 개혁을 표방했으면 오로지 개혁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개혁 그 자체에 대한 찬반의 비판론도 꼬리를 물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거창한 개혁을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의 구조를 보다 합리화시킬 수 있는 많은 법제적 개선이나 사회체제(재계, 정치계, 관료계, 학계, 언론계등을 포함하여)의 변화는, 작은 문제부터 실천해야만 할 명백한 것들이 너무도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개혁조차도 항상 기존의 썩은 체제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보수세력들의 반발에 부닥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 반발이나 보수의 벽을 뚫을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하여 대통령을 후원하고 그를 뽑아주고, 그럴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대통령의 권능을 올바르게 행사한 자가 누가 있는가? 과연 참으로 소신 있게 이러한 개혁의 칼을 휘두름으로써 역사의 진보, 즉 국민적 삶의 환경의 개선을 이룩한 자가 누가 있는가? 그 자리에 앉기 위해 모든 불의와 처절하게 싸웠던 정의로운 자들이 왜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바보가 되어버리고 마는가? 이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바로 그 자리의 영관(榮觀)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영관(榮觀)을 현실적으로 지속시키려는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영관의 지속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바로 노자가 말하는 대로 그 영관 속에 살면서도 그 영관에 초연한 삶의 자세를 유지하며 연처(燕處)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영관을 현실적으로 유지시킬 것이 아니라 그 영관을 전상법(轉相法)’하여 다른 차원의 도덕성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역사에 그 영원한 이름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당파(Factionalism)를 초월하는 보편적 정의(Universal Justice)를 소신있게 실현한다면 그 무형의 진실은 보다 리얼하게 국민의 삶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바로 모든 리더십의 본질은 연처초연(燕處超然)’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가 이땅의 정치를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매우 의미있는 멧세지인 것이다.

 

 

6. 기업가에게 던지는 메시지

 

우리나라 재계(財界)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문화의 특성상,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이익사회)적인 가치보다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적인 공동체 정신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유교사회의 기틀 속에서는 재벌적인 운영방식이 서양의 아토미스틱(atomistic, 원자의)한 기업의 운영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논리도 얼마든지 수긍될 수 있는 것이다.

 

나라의 경제를 큰 덩치 몇 개를 키워 박력있게 끌고 나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잘게 나누어 그 사이의 합리적 질서를 정착시켜 안정되게 운영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에 관하여서는 끊임없는 찬반의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재벌의 해체의 배면에는 국제금융의 획일주의, 달러의 지배력 강화, 그리고 기업구조의 취약성을 조장시키기 위한 자생적 문화의 해체라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논의도 일단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나라 재벌은 과도한 오너집중의 가치 체계로 인하여 너무도 명백한 합리적 질서를 결여하고 있는 상황이 많으며, 그 오너들의 대부분의 삶의 태도가 연처초연(燕處超然)’의 사회적 가치관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불합리성이요, 우리사회의 취약적 구조요, 제도적 타락이요, 자본의 폭력이다. 우리나라 재벌 오너들의 대부분이 권력의 집중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신성시하게 만들고,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본의 유통체계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콤뮤니티(community)의 논리가 사적인 자의적 논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현상이 우리사회의 최소한의 합리성의 기저마저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공적 노동에 의하여 공적 가치의 창출이 생겼다면 그것은 물론 공적인 논리에 의하여 분배되고 재투자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우리나라 재벌기업에 부재함으로써 발생하는 취약성은 곧 우리사회의 취약성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우선 이런 취약성을 해소시킬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오너와 오너훼밀리의 연처초연(燕處超然)’이다.

 

기업을 일으키고 돈을 번다는 과정 자체가 단순한 재화의 창출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재화의 창출은 가치의 창출이며, 가치의 창출은 곧 생명의 창출이다. 다시 말해서 돈을 번다는 과정자체가 나의 생명적 가치를 창출해나간 과정이요,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나의 삶(Life)의 혼(Spirit)이 투입되는 과정이다. 돈을 버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살았다. ‘나는 살았다함은 돈을 버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나의 생명의 가치를 반사적으로 인식해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돈은 나의 실존이다. 나의 실존의 혼이 투영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돈은 무용지물이요, 분쟁의 씨앗이요, 비인간화의 근원이다.

 

한국기업의 오너들의 가장 졸열한 생각은 바로 자기가 번 돈을, 그 돈과 무관한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발상이다. 자식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생명력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무생명의 물질을 물려주려 한다는 것처럼 졸렬한 발상은 없다. 다시 말해서 자기 당대의 영관(榮觀)을 후대에까지 유지시키려는 발상, 이것은 한 단임제 대통령이 자기가 물러난 후에도 자기 당의 사람이 계속 집권을 해야만 한다는 전제 하나 때문에 개혁의 도덕성을 구현치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 보고 좌충우돌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연출하는 꼴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한국기업의 오너들이 철저히 자기가 번 돈에 대하여, 그 영관(榮觀)에 대하여 철저히 연처초연(燕處超然)’하는 태도를 지킨다면 물론 기업의 운영 방식이나, 기업의 미래를 바라보는 모든 비젼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될 것이다.

 

자기가 번 돈은 자기에게서 끝나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번 돈을 물려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 돈과 결부된 자기의 카리스마나 그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노력없이 물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억수의 돈을 물려받는 한국 기업의 2세들 치고 가정불화나 전에 휘말리지 않는 자가 없다. 그리고 2세치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중함을 과시하는 예가 희소하다. 우리나라 기업문화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처초연(燕處超然)’의 이치를 깊게 구현해야 할 사각지대인 것이다.

 

당대의 돈은 당대에서 끝내라! 자녀에게는 교육과 생활의 부양비만 물려주면 족하니라. 그리하면 자연히 우리 기업들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노동과 경영의 융합, 자본으로부터의 경영의 해방, 다시 말해서 경영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대의 돈이 당대에서 끝나게 되면, 대부분의 재화는 기업경영의 자체적 합리화에 공헌하게 되거나, 넘치는 재화의 상당부분은 공적인 사회적 가치를 위하여 환원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회적 재단들과 엔지오(NGO) 시민단체들의 성숙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세금포탈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대책없이 만드는 재단이 아니라, 참으로 미래의 세대를 위한 사회적 보편가치를 창출해내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재단들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명력은 바로 이렇게 건강하고 유익한 그리고 실제적인 공익을 도모하는 재단과 단체의 활약에 의하여, 권력이 분산되고, 무형의 사회질서를 창출하는 어떤 저변의 문화가 확대되어나갈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자본주의의 현실을 결합할 수 있는 현재 유일한 대안은 유능하고 건강한 엔지오(NGO)에의 국민적 참여의 확대라고 보여진다. 엔지오는 엔지오 나름대로 많은 문제점이 있다. 많은 엔지오들이 자금의 궁핍과 열악한 발상 속에서 또 하나의 비열한 권력기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엔지오의 비리는 쉽사리 폭로되며, 어느 조직보다도 사회적 검증이 용이하다. 따라서 우리가 참여민주주의라고 하는 사회질서의 대전제를 수용하는 한에 있어서 건강하고 창조적인 엔지오의 기능의 확대는 앞으로 21세기 사회의 주요과제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성숙은, 외면적으로 이권이 배치되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엔지오의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는데 그 아이러니가 구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7. 노자를 대중화시키려 했던 한비자의 저자(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내하(奈何)’백본(帛本)에는 약하(若何)’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만승지주(萬乘之主)’가 모두 만승지왕(萬乘之王)’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25의 왕필 주가 9)’()’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그 맥락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은 자형(字形)으로나 자의(字義)로나 서로 통하기 때문에 초사(抄寫)과정에서 혼용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승지왕(萬乘之王)’이란 전차 일만대를 소유한 나라의 임금이란 뜻이다. ‘만승(萬乘)’이란 참으로 엄청난 국부를 소유한 나라가 아니면 유지하기 어려운 숫자다. 옛날에는 국력(國力)을 이 전차 수레의 숫자를 기준으로 해서 말했다. 백승지국(百乘之國), 천승지국(千乘之國), 만승지국(萬乘之國)이 있을 것이다. 만승지국(萬乘之國)이란 당대의 거의 최고의 대국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 만승지국의 임금으로서 하늘 아래 그 몸을 가벼이 굴릴 수 있으리오?

 

제일 마지막의 경즉실본 조즉실군(輕則失本, 躁則失君, 가벼이 하면 그 뿌리를 잃고, 조급히 하면 그 머리를 잃는다)’의 구문에는 재미있는 텍스트의 문제가 하나 개재되어 있다. 그 유명한 법가(法家)의 명작, 한비자(韓非子)콜렉션 속에 사상 최초의 노자주해서인 해로(解老)유로(喩老)두편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지만, 해로(解老), 유로(喩老)의 역사적 의의는 백서본(帛書本)의 발견으로 더 크게 부각되게 되었다. 해로(解老), 유로(喩老)가 기저로 삼고 있는 노자텍스트가 백서본(帛書本)과 거의 동시대의 문헌이며, 그 체제가 도덕경(道德經)’이 아닌 덕도경(德道經)’의 체제로 되어있어, 백서(帛書)와 동일한 전승의 문헌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로(解老), 유로(喩老)의 특징은 노자라는 텍스트의 전면적인 주해서가 아니라, 그 저자가 본인의 이야기를 먼저하고 그 논지에 합당한 노자의 구절을 골라,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故曰]’라고 하면서 노자의 원문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노자(老子)라는 텍스트가 먼저 있고 그것을 ()’하거나 ()’한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가 먼저 있고, 그 자신의 해()를 근거지우는 노자(老子)텍스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유의 상황에서는 실제로 기자의 주관이나 편견에 따라 텍스트의 해석이 단장취의(斷章取義)적으로 혹은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왜곡될 여지가 있으며, 그러한 의미의 맥락에 따라 텍스트 자체의 변형이나 찬개(撰改)가 이루어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해로(解老), 유로(喩老)의 기자가 이런 방식의 주석을 택한 이유는, 노자를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고 또 쉬운 비유를 들어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로(解老), 유로(喩老)의 최대의 목적은 노자텍스트의 정확한 해석이 아니라, 노자사상을 일반화시키고 대중화시키려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노자사상의 대중화(Popularization of Lao Tzu Thought)를 위하여서는 이러한 해유(解喩)’의 방식이보다 적합하다고 그 기자는 판단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해유(解喩)’의 방식의 극한적 발전이 오늘날의 장자(莊子)라는 위대한 텍스트를 성립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老子』 → 「解老喩老」 → 『莊子

 

 

8. 왕필본보다 한비자의 판본이 정본이라 못박다

 

그런데 유로(喩老)의 앞머리 쪽에 바로 이 장의 마지막 구문이 인용되어 있는데 한비자(韓非子)(記者)는 그 인용에 앞서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살아 생전에 태자 하(太子 何, 惠文王)에게 너무 일찍 왕위(王位)를 물려주어 자신을 왕부(王父)’라 칭하고 초연(超然)한 척하였으나, 결국 형제분규에 휩싸여 나중에 유폐당하여 비참하게 아사(餓死)하고마는, 중국판 리어왕(King Lear)’ 이야기를 유(, 비유)의 한 전형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그가 너무 가볍게 처신하여 그 실세를 잃은 것을 ()’이라 하고[無勢之謂輕], 너무 일찍 왕위(王位, 그의 권세의 보급 원인 輜重[짐수레]에 비유)를 떠난 것을 ()’[離位之謂躁]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경솔함으로써 신하(臣下)를 잃었고, 조급함으로써 군위(君位)를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의 경솔함으로써 신하(臣下)를 잃었고, 조급함으로써 군위(君位)를 잃었다[輕則失臣, 躁則失君]’라는 구절이 곧 노자원문으로써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 왕필본과 비교해 보면 그 텍스트의 차이가 있다.

 

 

王本 輕則失本, 躁則失君.
喩老 輕則失臣, 躁則失君.

 

 

다시 말해서, 유로(喩老)본은 군()과 신()의 대비관계를 아주 그럴듯한 논리로 짝지워서 완벽한 대구(對句)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왕본(王本)실본(失本)’실군(失君)’은 별 재미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유로(喩老)본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고 따라서 이 구절은 왕본(王本)이 전사(轉寫)되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킨 결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못 박았다.

 

 

9. 한비자의 판본보다 왕필본이 정본임이 드러나다

 

그런데 백서(帛書本)의 출현은 왕본(王本)에게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백서본(帛書本)은 갑을(甲乙)이 모두 왕본(王本)과 동일한 문자로 되어 있다.

 

 

帛書甲 巠則失本, 躁則失君.
帛書乙 輕則失本, 趮則失君.
王本 輕則失本, 躁則失君.

 

 

-의 대비는 완전히 한비자(韓非子)의 창작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와같이 고대 텍스트의 문제는 일률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많은 착종관계를 노출시킨다. 왜냐하면 전국시대(戰國時代)로부터 한초(漢初)에걸친 기자(記者)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본(定本, Standard Text)’개념이 근원적으로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왕본(王本)輕則失本, 躁則失君은 바로 최초의 구문인 重爲輕根, 靜爲躁君과 대비를 이루는 것이며, 여기서 군()이 반드시 군위(君位)’라고 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포지션 개념으로만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는 고전의 해석에 있어서 추상적 해석이 구체적 해석보다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구체적인 즉물적인 사례가 보다 고졸(古拙)한 것이라는 편견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가 25의 해석에서 이미 목격했듯이 노자사상은 이미 BC 4세기경에는 그 추상적ㆍ보편적 성격의 극한을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유로(喩老)의 노력은 이러한 추상적ㆍ보편적ㆍ개념적인 사상을 구체적ㆍ국부적ㆍ실제적인 사례로 환원시킴으로써 그 사상을 대중화시키려는 후대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고대사는 구상(the Concrete)에서 추상(the Abstract)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노자의 고텍스트들은 여지없이 깨버린다.

 

오히려 중국의 고대사상은 추상에서 구상으로 발전되어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지발달의 단계에 대한 헤겔식 변증법의 도식적 편견을 깨버려야 한다. 역사는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퇴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26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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