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트어와 성각문자
인간의 언어는 문자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
❝도마복음서는 콥트어로 쓰여졌다.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 언어 발달사의 최후단계에 해당되는데 희랍문자를 차용한 알파벳언어이다.❞
도마복음서 텍스트는 콥트어(Coptic)로 되어있다. 물론 도마복음서가 최초로 콥트어로 집필되었다고 간주되지는 않는다. 앞서 우리가 논의했듯이, 옥시린쿠스 사본(POxy)을 통하여 콥트어 텍스트에 선행하는 희랍어 텍스트의 존재가 입증되기 때문이다(『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1, 325~328). 그러나 희랍어 텍스트는 부분 편린(片鱗)만 남아있는 데 반하여 콥트어 텍스트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콥트어를 통하여 도마복음서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콥트어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희랍어의 자모를 빌리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집트말이다. 즉 희랍어 자모를 이집트말에 대한 이두식표기로서 활용한 것이다. 희랍어 자모는 24개가 있는데, 24개만 가지고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다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전 단계의 민용(民用)문자인 디모틱문자(Demotic)에서 7개의 글자를 빌려왔다. 그 7개 글자의 음가만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Sch(Schei), F(Fei), Ch(Khei), H(Hori), Dsch(Djanjia), Sch(Shima), Ti(Ti).
콥트어는 함ㆍ셈어족(the Hamito-Semitic language family)에 속하는 고대 이집트언어의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집트 언어사에서 최초로 구어의 발음체계를 온전하게 표기하는 체계라는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전의 이집트말 표기방식은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象形文字)’라고 알고 있는 것인데 그것으로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고대 이집트문자의 발음체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콥트어라는 창문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해독을 놓고 영국의 의사이자 물리학자인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과 불란서의 언어학자 샹폴리 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이 경쟁을 벌였을 때 토마스 영의 연구가 샹폴리옹에 필적할 수 없었던 것도, 샹폴리옹이 콥트어에 달통한 데 반하여 영은 콥트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귀결된다.
콥트어는 1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7세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까지 거의 유일한 이집트의 공식언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파벳을 사용하여 구어를 표기하는 것이 너무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콥트어가 1세기부터 이미 이집트말의 표기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언어발달 사적 이유로 고찰되는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이유다. 즉 콥트어의 등장은 이집트가 기독교국가로 변해버렸다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사태이다.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문헌이나 제식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데는 전통적 상형문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형문자는 그 자체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적 신념을 표방하는 성스러운 세계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융합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프톨레미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는 기간(BC 305~30) 동안에는 국제통용어인 희랍어가 상용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콥트어는 희랍어의 명사어휘를 대거 차용하였으며, 명사 이외로도 형용사, 동사, alla, gar, de, ē, men, hōs, hina와 같은 기능어도 차용하였다. 그리고 단어의 어근(語根)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콥트어 문학은 파코미우스를 계승한 수도원운동의 대부 셰누테(Shenute, c.360~c.450)의 저작활동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콥트어 자체가 기독교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인들은 콥트어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랍인들은 997년 공식적으로 콥트어를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콥틱 기독교는 무슬림의 탄압 속에서도 줄기차게 살아남았고 오늘날 이집트 인구의 10%가 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에 속해 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일상용어로서의 콥트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콥틱교회의 제식언어, 제식음악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어(死語)라 해야 할 것이다.
▲ 영국박물관에 진열된 로제타 스톤의 일부, 1799년 8월 알렉산드리아 부근의 로제타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불란서 장교가 발견했으나 불란서군이 패하자 영국 외교관이 전리품으로 압수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은 빼앗기기 전에 복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샹폴리옹은 12살 때 이 복사본을 보고 해독을 결심했다. 프톨레미5세의 칙령(BC 196)인데 같은 내용이 성각문자와 민용문자와 희랍어로 병기되어, 쉽게 알 수 있는 희랍어로부터 이집트 고대문자의 수수께끼를 파헤쳐나갈 수 있었다. 이 현무암이 근대 이집트학의 출발이다.
콥트어 이전의 이집트문자를 말할 때,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 상형(象形)이란 문자 그대로 사물의 형태(形)를 본뜨는 것(象)이다. 우리가 아는 뫼 산(山) 자는 산의 모양을 본뜬 것이고, 내 천(川) 자는 시내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문자이든 이집트문자이든 이런 상형자(象形字)는 지극히 제한된 것이다. ‘사랑’이나 ‘신’이나 ‘은총’이나 ‘구한다’와 같은 형체 없는 개념들을 상형의 방식으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이에 우리는 고대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의 언어에 대한 아주 근원적이고도 원칙적인 이해를 해야한다. 인간의 언어는 표기되기에 앞서 소리로서 소통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문자의 체계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소리의 체계와 무관한 표의문자(ideogram)와 표음문자(phonogram)를 이원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언어학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표의문자라고 알고 있는 한자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옛 고(古)라는 글자의 형태에서 ‘古’가 어떠한 이유에서 ‘옛’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는 갑골문에 있어서도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런데 古와 관련된 글자를 보면, 估, 沽, 故, 姑, 固, 痼, 枯, 詁, 苦 등에서 알 수 있듯이 古라는 것은 단지 gu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성부(聲符)일 뿐이며, ‘옛’이라는 의미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자를 단순히 뜻글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리글적인 요소를 단음절의 글자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문자가 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새’를 의미하는 표의자라고 한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다. 새 모양의 글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a라는 음가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상형자나 표의자가 아니라, 좀 회화적으로 약속된 알파벳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로제타 스톤에 1,419개의 싸인이 있었는데 겹치지 않는 모양은 66개밖에 없었다. 이 66개를 상형문자라고 해버리면 복잡한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의 토마스 영은 이집트 문자가 표음적 성격이 있음을 암시했으나 샹폴리옹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다가 어느날 불란서의 중국학 학자로부터 한자도 표음적 요소로써 풍요롭게 발전한 언어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이집트 문자가 표음문자(phonogram)와 표어문자(表語文字, logogram)와 한정사(determinatives), 3요소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표음문자에 해당되는 싸인은 24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그 음가를 정확히 재구성해내었다. 1822년 이집트의 고대사가 개벽되는 순간이었다. 고대이집트의 24개의 알파벳 시스템은 페니키아 알파벳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문명의 알파벳의 시원이 된 것이다.
현대언어학에서는 표의문자(ideogram)라는 말보다는 표어문자(logogram)라는 말을 즐겨쓴다. 지아비 부(父) 자는 아버지라는 단어(語)의 로고(logo)라고 파악한다. 한자의 경우에는 일자일어(一字一語)의 원칙이 고수되지만 이집트 문자나 그 이전의 설형문자에서는 복합적 자형들이 동원된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립스(hieroglyphs)를 상형문자라고 부르지 말자! 그것은 단어의 뜻 그대로 성각문자(聖刻文字)라고 불러야 한다. 보수적 성향의 성각문자는 BC 3200년경부터 AD 4세기까지 장례와 종교적 목적으로 줄기차게 쓰였다. 그리고 성각문자보다 한 5세기 늦게(제2왕조 말기, BC 2686년경) 사제문자(hieratic)가 발전한다. 그리고 제26왕조(BC 6·7세기) 때부터 행정·상업·문학용의 민용문자(demotic, 민중문자라고도 함)가 널리 쓰였다. 민용문자는 희랍어와 병행되다가 콥트어의 발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 문자의 변천사는 인간의 말의 표기체계가 표어적 성격에서 표음적 성격으로 변천해가는 하나의 보편적 양태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말의 표기변천사도 비슷하다).
도마복음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다: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니라.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문서를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세계인들의 양심의 호소와 협조에 따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낫세르 대통령이 골동상의 소유물을 국유화시켰고, 심리학자 융이 소유했던 코우덱스도 결국 반환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중 오직 도마복음서 첫 두 페이지가 전시되고 있는데 콥틱 박물관은 일체의 촬영을 불허했다. 나는 박물관 사무실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도마복음서 하나만 촬영케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으나 절대불가라는 방침만 되풀이했다. 유네스코의 관계자들의 이름까지 들먹였어도 이집트 문화재청 장관의 허락서를 직접 받아오라고 호통쳤다. 나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하여 만리길 여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카메라를 숨겨 극적으로 보안장치를 통과하여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무장경비원들이 여기저기 눈을 부라리고 있는 와중에 그들을 따돌리고 열 번째 홀의 진열장 속에 있는 도마복음서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큰 글씨는 ‘The Apocryphon of John’으로 앞 책의 제목이고, 그 다음부터 도마복음서의 장엄한 글씨들이 시작되고 있다. 파피루스 한 페이지 크기가 28.2×14.8cm.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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