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절실하게 읽으려면
장자는 타자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했던 철학자입니다. 한마디로 타자의 철학자였죠. 혹은 사랑의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닷새에 대한 노나라 임금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면서 장자는 사랑의 한계와 가능성을 고민하니까요. 어쨌든 장자의 결론은 단순합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말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닷새로 하여금 해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암벽 틈에 살게 하고, 작은 물고기나 벌레를 먹게 하고,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소리를 듣게 해야 했다는 거죠. 바로 그게 노나라 임금과는 달리 바닷새가 원하는 것들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공자의 ‘서(恕)’가 전도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로 바뀌게 됩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이 폐기되고, 그 대신 ‘인소불욕(人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 새로운 윤리 강령이 되는 것입니다. 타자를 사랑한다면 타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장자의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면 우리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딸, 아들, 선배, 후배 등등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도 바닷새처럼 타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파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또 엄습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노나라 임금일 수도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죠.
자신의 사랑과 삶을 간절하게 되돌아보는 순간, 바닷새 이야기에서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었다는 부분입니다. 노나라 임금에게는 사랑이 파국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사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자기 사랑에 취해 바닷새의 타자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노나라 임금의 사흘을 더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흘 동안 임금은 바닷새를, 그 바닷새의 내면을 읽으려 했을까요? 바닷새 이야기에는 새가 어리둥절해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며 슬퍼했는데, 노나라 임금은 어째 서 사흘 동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요? 타자는 말이죠, 처음 봐서는 그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타자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게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내가 하는 행동을 타자가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충분한 시간이었는데도 임금은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타자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읽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을 타자도 좋아할 것이라는 자신만의 확신에 완전히 취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 노나라 임금은 일종의 스토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스토킹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위인데도 상대방이 원한다고 믿는 데서 시작되니까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일상적인 차원에서 사랑은 일차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려는 감정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죠. 상대방이 원하는 걸 내가 해줄 때 상대방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지 않죠. 나로 인해 행복을 느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나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막 시작된 연애 초기에 우리는 상대방이 원하는 걸 포착하려고 그야말로 혈안이 됩니다. 그걸 알아야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어 그 사람 이 내 곁에 있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연애 시절에는 집요하게 상대방을 읽으려 하고, 그만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잘 압니다. 시간이 흘러 오래된 커플이 되거나 혹은 결혼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읽으려는 노력은 점점 사그라들죠. 읽기를 멈추는 순간, 상대방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사랑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부부는 연인이든 상대방이 원하는 걸 더 이상 찾지 않는 관계가 된다면 그 사랑은 사실상 끝난 겁니다. 상대방이 내 곁에 머물도록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이니까요. 그 대신 이제는 웬만하면 상대방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아니 떠나기 힘들다는 오만함이 자란 겁니다.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궁궐로 데려와 종묘에 가둔 정황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바닷새가 나를 떠날 수 없으니, 바닷새를 절실하게 읽으려는 의지도 약해진 거죠. 만약 바닷새가 언제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었다면,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읽으려 했을 겁니다. 바닷새가 싫어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행하는 순간, 바닷새는 나를 떠나 표연히 날아 가버릴 테니까요.
인용
목차 / 1. 철학을 위한 찬가 /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 (0) | 2021.05.16 |
---|---|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2. 사랑의 비극을 막는 방법,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 (0) | 2021.05.16 |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2. 사랑의 비극을 막는 방법, 노나라 임금이 몰랐던 것 (0) | 2021.05.16 |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 쌀도 밥도 안 나오는 일들의 위대함 (0) | 2021.05.16 |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0) | 2021.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