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무백과 공자의 효 담론
우리는 『논어(論語)』의 구절들을 아주 상식적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당연히 주어져 있는 평범한 사태로서 읽어버리고 말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논어(論語)』 「위정」의 첫 마디,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孟武伯問孝]’라는 말은 객관적인 사태의 기술로서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뜬구름 없이 갑자기 효를 묻는가? 효가 무엇이길래 공자에게 갑자기 던지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가? 효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원초적 감정이고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저절로 느끼는 감성의 체계일 것이다. 결코 이성적 질문의 대상으로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라는 대 석학을 만났을 때 갑자기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는 사실은, 효가 이미 사회적 담론으로서, 즉 하나의 에피스팀(episteme, 인식)으로서 객관화되고 공론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무엇이었던가?: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일 뿐[父母唯其疾之憂].”
‘효를 물었다’ 했을 때의 효는 분명 당시의 사회적 가치를 집결시킨 하나의 개념이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은 질문의 대상이 된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행하고 있질 않다. 즉 그 개념의 구조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 전혀 없다. 그리고 효라는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 관한 복종이나 의무의 냄새가 전혀 없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을 말했을 뿐이다【불교의 은(恩)이나 기독교의 카리스마(χάρισμα)와 상통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적 성찰이나 설명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느낌’일 뿐이다.
여기에 바로 공자의 위대성이 있고 인간을 바라보는 그 원초적 도덕성의 진실성이 있다. 이러한 공자의 느낌에 대해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운운할 수는 없다. 라캉의 ‘미끄러짐(시니피앙에 대해 시니피에가 즉각적으로 부착되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는 시니피앙의 연속일 뿐이다. 시니피에는 무의식의 담론 속으로 미끄러져 숨어버릴 뿐이다)’을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과 좌절과 갈망이 범벅이 된 인간의 갈등구조가 아닌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이미 담론화되고 있는 효를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서 형상화하여 그것을 보편적 통치이념으로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 『효경』이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언제 그러한 작업을 감행하였을까?
인용
'고전 > 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경한글역주, 제8장 선진시대 효의 담론화 - 『효경』이라는 책명과 내용이 인용된 최초의 사례 (0) | 2023.03.31 |
---|---|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새로운 보편주의적 제국의 꿈 (0) | 2023.03.31 |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유대교 창조신화나 희랍신들의 세계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효 결여 (0) | 2023.03.31 |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인도유러피안 어군 속에는 ‘효’라는 개념이 없다 (0) | 2023.03.31 |
효경한글역주, 제7장 효와 제국의 꿈 - 『효경』의 ‘경’은 오경박사제도 이후의 경 개념일 수 없다 (0) | 202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