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진시황 분서령의 역사적 정황
금ㆍ고문의 문제는 중국고전을 대할 때 가장 골치아픈 문제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금ㆍ고문에 얽힌 문제가 역사적으로 많은 과제상황들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매우 답답하고 난삽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금ㆍ고문의 문제 그 자체는 결코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금ㆍ고문에 대하여 학자들이 지어낸 담설들이 복잡할 뿐이다.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와 같은 비젼 있고 포용적인 인물의 충고를 계속 들었더라면 금ㆍ고문 문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극좌(법가의 좌파)에서 극우(새 체제의 승상)로 전향한 이사(李斯) 같은 쫌팽이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제국을 운영하는 바람에 분서(焚書)와 같은 비극적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옛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진시황 34년(BC 213) 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기사를 보면 순우월(淳于越)과 같은 충신이 고인(古人)들의 지혜를 본받지 아니 하고는 제국을 장구(長久)하게 지킬 방도가 없다는 것을 논구하는데 대한 이사(李斯)의 논박이 나온다. 승상 이사의 주장인즉, 이미 통일제국이 완성되었고(BC 221), 체제가 하나로 정비되었는데 지식분자들은 제각기 사학(私學: 사사로운 학문)만을 고집하고, 변화된 현재를 인정치 아니 하고 옛것만을 배우려 하며, 당세를 비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옛날 제후시대가 아니니, 고(古)를 말하여 금(今)을 해하고, 허언(虛言)을 수식하여 실(實)을 어지럽히는 일체의 사상경향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리어[別黑白] 하나의 지존을 정립하였으니[定一尊],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 붕당을 조성하고 황제의 위세를 떨어뜨리게 하는 일체의 다양한 논의를 싹쓸이 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다. 진(秦)나라에서 만들어진 관학 이외의 시(詩)ㆍ서(書), 제자백가 전적을 모두 불태우고, 시ㆍ서를 운운하는 자들은 처형하여 시신을 저잣거리에 걸어놓고, 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하는 놈들은[以古非今者] 모조리 일족을 멸하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 령(令)을 내린 지 30일 내로 전적을 불사르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만리장성 축조노역에 내몰아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러자 어리석은 진시황은 그 자리에서 오케이[可] 하고 분서의 령을 내린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장성은 진시황 때의 것이 아니다. 진시황이 쌓은 것은 주로 토벽이며 1억 8천만 평방미터의 흙이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죽은 일꾼들의 시체도 건축자재로 쓰였다고 전한다.
성벽이 오로지 방어목적이라는 우리의 상념도 황당한 것이다. 보초병들은 쉽게 매수될 수도 있다. 성벽의 힘은 오직 그것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장성은 주로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해서 사람이나 물자를 산악지역을 통해 신속하게 이동시키는데 쓰였다.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 때 축조된 것이다.
이사의 분노에도 현금(現今)을 인정치 아니 하고 고석(古昔)에만 집착하는 지식인들의 보수성향에 대한 답답함이 서려있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금(今)만이 옳다하고 그 이외의 고(古)에 대한 생각은 싹쓸이 해버려야 한다는 발상은 집체주의ㆍ전체주의의 독선(a totalitarian dogma)에 불과하다.
대운하나 극단적 반공이념 같은 터무니없는 발상을 지고의 선으로 추앙하고 그 외의 모든 생각을 수용치 아니 하려는 발상과 대차가 없다. 이사의 ‘이고비금(以古非今)’에 대한 분노 때문에, 천하의 전적을 다 불사르는 분서의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매스컴이 존재하지 않는 시절에 진시황의 하령(下令)이라 한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책들을 부지런히 불태웠을까? 함양(咸陽: 진나라 제도帝都) 주변의 몇몇 부자들은 태웠을지 몰라도 수만 리 떨어진 노나라ㆍ제나라 지역에서 귀한 책들을 불태웠을까? 뿐만 아니라, 분서라 하지만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 등등에 관한 책들은 제외시켰다고 하니, 다시 말해서, 말썽 많은 문과계 불온서적은 다 태우고 이과계 서적은 제외시킨 것이다. 재미있게도 『주역』은 이과계로 분류되는 바람에 분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하게 무작위로 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은 분서의 령을 내린 지 불과 3년 만에 죽는다(BC 210). 그리고 서한 혜제(惠帝) 4년(BC 191)에 공식적으로 협서(挾書)의 율(律)이 해제된다(협서율: 민간의 장서를 금지하는 법률). 그러니 공식적으로 협서율이 적용된 기간은 12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진시황의 분서령으로 인해 많은 고대전적이 유실된 것은, 정신적인 위축감과 더불어, 의문의 여지가 없겠지만, 사실 협서율이 적용된 그 기간은 유례없는 격랑의 세월이었고 거대한 제국의 흥망이 엇갈리는 전환기였다. 따라서 무지막지한 전란의 풍화 속에서 사라진 전적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직하기만 한 항우가 함양을 함락했을 때 투항한 진나라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인민을 도륙하고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3개월 동안을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燒秦宮室, 火三月不滅]고 했으니 그때 무엇이 얼마큼 탔는지 알 수가 없다. 강유위(康有爲, 캉 여우웨이, Kang You-wei, 1858~1927)의 말대로 이사가 분서령을 내렸을지언정 자기가 보는 책들은 모두 진궁(秦宮)에 보관했을 것이고, 경서들의 관본(官本)은 다 궁안에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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