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국전(孔安國傳)』과 『정현주(鄭玄注)』의 진위논쟁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공안국전과 정현주가 모두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던 공안국과 정현의 작품인지에 관해서는 상고(詳考)의 여지가 많다. 그리고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유향(劉向)이 비부(秘府)에서 전적을 정리하였는데, 금문과 고문을 대교(對校)하여 새롭게 18장으로 정(定) 했다고 했는데, ‘안본(顔本)을 가지고써 고문(古文)과 비교하여 그 번혹(繁惑)함을 제거하고 18장으로 정하였다[以顏本比古文, 除其繁惑, 以十八章爲定].’이라고 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유향은 고문텍스트를 금문체제에 합하도록 정리한 것이다. 유향(劉向, BC 79 ~ BC 8)은 기본적으로 고문경학의 대가이므로 그가 만든 『효경』이 18장체제였다 할지라도 그의 텍스트는 고문효경이었다고 사료된다. 이 유향텍스트에다가 정중(鄭衆)과 마융(馬融) 두 사람이 주(注)를 지었다고 했는데, 마융의 주 또한 고문텍스트에 대한 주였다고 볼 수 있다. 마융의 주는 후세에 전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고문 『효경』에 대한 한대의 주는 공안국(孔安國)의 전(傳)이 유일한 것이다.
우리나라 다산 정약용에게 충격을 준 오규우 소라이의 제자 다자이 쥰(太宰純, 1680~1747)이 중국에서는 사라진 공전(孔傳) 고문효경이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래로부터 일본에 존재하는 다양한 판본을 참고, 교정(校定)하여 향보(享保) 17년(1732)에 『효경공전(孝經孔傳)』을 가각(家刻)했는데, 이 판본이 중국에 알려져 포정박(鮑廷博. 1728~1814)【청나라 안휘성 사람으로 절우제일(浙右第一)의 장서가. 교간校刊의 대가】의 권위있는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의 제1집으로 들어갔다. 노문초(盧文弨)의 서문에 잃어버린 고경을 천년만에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천하의 학사들이 한목소리로 쾌재를 불러야할 사건[此豈非天下所同聲稱快者哉]!이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학계의 위상이 높아졌고, 나머지 정주(鄭注)도 반드시 일본에 보존되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중국학자들에게 생겨나자, 정주 발굴작업이 일본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자이 쥰의 『효경공전』은 여러 판본을 종합한다 하면서 그 본래 면모를 상실시켰으며, 실제로 준거하기 어려운 무가치한 판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다자이의 판본에 의거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고문효경』에 관한 한 다자이의 공과는 반반이다.
그 뒤로 동진(東晋)의 목제(穆帝) 영화(永和) 11년(AD 355), 그리고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원년(AD 376)에 군신(群臣)을 집결시켜 『효경』의 경의(經義)를 의론케 한 결과, 박사 순창(荀昶)이 제설(諸說)을 찬집(撰集)하여 『정주효경(鄭注孝經)』을 종(宗)으로 하였다【『당회요(唐會要)』 권77, 「논경의(論經義)」】. 이 사건을 계기로 『정주효경』을 존신(尊信)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양(梁)나라에 들어서면서 『정주(鄭注)』와 『공전(孔傳)』은 다같이 학관(學官)에 세워지게 되었는데【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금ㆍ고문경이 다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 양말(梁末)의 전란을 거치면서 『공전(孔傳)』이 망일(亡佚)되고 말았다. 따라서 남북조시대의 진(陳, 557~589) 나라,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6~581)의 시기에는 오직 『정주(鄭注)』만이 세상에 행하여졌다(「수지隋志」).
하여튼 박사 순창이 『정주』를 종(宗)으로 삼아 『정주(鄭注)』가 독주하게 되자, 『정주』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게 된다. 남제(南齊)의 국자감 박사였던 육징(陸澄, 425 ~ 494, 자 언연彦淵)은 상서령(尙書令) 왕검(王儉)에게 『정주』를 주면서 이것이 분명 정현 자신의 주가 아닌 듯하니 잘 검토하여 보고 비부(秘府)에 간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제출한다【『남제서(南齊書)』 열전 제20, 「육징전」을 참고할 것】. 그러나 왕검은 설사 그것이 정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효경』의 가치는 사라질 수 없으므로 관행대로 학관(學官)에 존치하는 것이 옳겠다고 대답하여 그대로 존속시켰다. 따라서 『정주(鄭注)』는 격동의 시기에도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한편 『공전(孔傳)』은 양말(梁末)의 난에 망일되었으나,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4년(AD 594)에 비서감(秘書監) 왕소(王劭)가 경사(京師)에서 우연히 『공전(孔傳)』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방득(訪得)하자마자 하간(河間)의 유현(劉炫, 자는 광백光伯, 당대의 석학)에게 보내었다. 유현은 새로 발견된 『공전』에 서(序)를 쓰고, 『공전』을 교정하여 소(疏)라고 말할 수 있는 『효경술의(孝經述議)』 5권을 짓고, 민간에서 『공전(孔傳)』을 강의하면서 유포시켰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학령(學令)에 저록(著錄)하고, 『정주』와 더불어 학관(學官)에 세웠다.
그렇지만 당대의 유자들은 유현이 강술한 『공전』은 “유현의 위작(僞作)이며 공안국 자신의 구본(舊本)이 아니다”라고 박격(駁擊)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고문효경공안국전』은 옛부터 수나라 유현의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경술의』 자체가 유실되어 지금 그 위작설을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일본의 학자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공전』 관계 문헌들 중에서 『효경술의』를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위작자는 위나라의 왕숙(王肅) 일파의 한 사람이며 유현은 교정자에 불과하다는 신설을 발표했다. 하여튼 유현의 『술의(述議)』사건 이후로 공(孔)ㆍ정(鄭) 이주(二注)의 진위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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