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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 금문경과 고문경 출현과 정본 논란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 금문경과 고문경 출현과 정본 논란

건방진방랑자 2023. 4. 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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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경과 고문경 출현과 정본 논란

 

 

하여튼 이러한 전란의 시기에 협서율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불탄 서적들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반작용을 확실하게 의식화시켰을 수도 있다. 혜제(惠帝) 이후, 문제(文帝)ㆍ경제(景帝)의 시기에 이러한 복구사업은 열심히 진행되었고 무제(武帝) 때 이르러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른다(BC 136).

 

복구작업 중 가장 먼저 이루어진 방식은 고경들을 외우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암송한 내용을 다시 옮겨 쓰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 만들어진 경전은 당대의 문자로 기록되게 된다. 당대의 문자란 이미 진나라에서 노예(하급관리)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단순화되고 규격화된 예서(隸書)를 말하는 것이다. 한나라 당대의 문자로 쓰여진 경서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새로 구술을 통해 복원된 경전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금문경은 아무래도 사람의 두뇌의 기억작용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성격에서 좀 멀어질 수는 있으나, 의미론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며, 분량이 축소되어 보다 정돈된 체제를 갖춘 느낌을 줄 수가 있다. 그래서 금문경은 일단 서한(西漢: 전한) 시대의 대세로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민간에 불타지 않고 옛 문서로 남아있던 것이 발견되며, 산의 동굴이나 집의 흙벽이나, 특별한 비부(秘府)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나라 이전의 육국문자(六國文字)로 쓰여진 것이며 올챙이[蝌蚪] 같이 생긴 꼬부랑 글씨, 과두문자(蝌蚪文字) 등등의 고대자형으로 쓰여진 문헌이라 하여 고문경(古文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고문경이 출현할 때마다, 이미 금문경으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박사(博士)들은 그것이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게 되고, 또 고문경으로 새로운 권위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금문경이야말로 인간의 가냘픈 기억에 의존한 불확실한 문헌이며, 일차자료가 아닌 이차자료라고 논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금고문논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경전마다 개별적으로 논의되어야 하지만, 고문경은 금문경에 의존하던 박사들이 보지 못했던 금시초문의 새 자료가 많으며 따라서 금문경보다 대체적으로 분량이 더 많다. 그리고 아무래도 문장이 껄끄럽고 고졸하며 허사 같은 것이 더 많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생겨난 문제가 금고문논쟁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족하다.

 

그런데 금고문논쟁이 외면상으로는 경전의 오리지날한 정본에 누가 더 가깝냐는 테스트의 싸움 같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경전의 오리지날리티와 무관한 권력싸움일 때가 많다. 서울대학교에 과()가 하나 생겨나면 새로운 교수자리가 생겨나 신나는 사람이 있게 되고, 있던 과가 통폐합되거나 축소되면 기존 교수들이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사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말하는 5경이라는 것이 과연 정본(定本)이라는 것이 있는 문헌이었냐고 하는 문제이다. 확고한 정본이 있고 나서 금ㆍ고문 문제가 있다면 정밀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지만 정본 자체가 당초에 없는 것이라면 금ㆍ고문 문제는 웃기는 말장난이 되고 만다. 이런 말은 진실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21세기에나 와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진시대에 정경(正經)’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시는 종이도 없었고 인쇄라는 획일적 유통체계가 없었다. () 아니면 백() 밖에 없었는데 간()은 무지하게 분량이 많았고, ()은 무지하게 비쌌다. 따라서 문서란 아주 소수가 베껴서 보관하는 것인데 베끼는 사람마다 전승계통과 인식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같은 문헌은 선진시대에 단 하나도 없었다.

 

 

아시카가본(足利本) 효경직해(孝經直解). 토찌기현(栃木縣) 아시카가시(足利市) 아시카가학교(足利學敎) 유적도서관(遺蹟圖書館) 소장. 일본 국보, 공안국(孔安國)의 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에 주()가 달려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효경직해가 과연 누구의 작인지에 관해 이견이 있었다. 그것이 유현(劉炫)의 작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결국 유현의 효경술의(孝經述議)를 저본으로 하고 형병(邢昺)효경정의(孝經正義)를 참고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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