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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고문효경서 - 1. 효경자~부전야(孝經者~不傳也)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고문효경서 - 1. 효경자~부전야(孝經者~不傳也)

건방진방랑자 2023. 4. 2.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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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

 

공안국 (孔安國, 콩 안꾸어, Kong An-quo)

 

 

1. 효경자~부전야(孝經者~不傳也)

 

 

효경이라는 서물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지고한 행위이며, ‘()’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孝經者何也? 孝者, 人之高行; , 常也.

 

이 첫마디는 역시 효경이라는 서물의 명호(名號)에 대한 해설로 보여진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전(canon)의 경으로 해석하고 있질 않다는 것이다. ‘이란 효가 항상스러운 인간세의 원리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반명사로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행의 근본[百行之本]으로서의 효()는 더 없이 지고한 인간의 행위(高行)이며, 항상스러운 원칙이요 원리이다.

 

 

하늘과 땅이 있고, 그 속에서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래, 효도(孝道)라는 것은 자연히 생겨나게 마련인 것이다. 때마침 위로 명철한 군주가 있게 되면 거대한 교화가 마치 홍수가 범람하듯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철한 군주가 없게 되면 사도(斯道)는 멸절되어 자취를 감추고 말게 되는 것이다.
自有天地人民以來, 而孝道著矣. 上有明王, 則大化滂流, 充塞六合. 若其無也, 則斯道滅息.

 

여기 대화(大化)’라고 하는 것은 풍속에 의한 사회의 교화를 의미한다.

 

육합(六合)’은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의 방위를 말하며 온 천하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 논조는 효라는 덕행의 교화(敎化)가 정치적 리더십(political leadership)의 유ㆍ무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미 효를 파악하는 관점이 매우 정치적이고 하이어라칼(hierarchical, 계급제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서(孔序)가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전한 시기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미 전한대(前漢代)에 효의 파악이 위로부터 아래로의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한대의 가족윤리나 일반적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단지 효도의 방류(滂流)를 군주의 효도의 실천이라는 좁은 인과에 국한해서 말하지 않고 명왕(明王)’이라고 말한 것은, 명철한 리더십이 확보되어야 효도가 방행(滂行)하는 훈훈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일반적 논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도덕적으로 명철한 리더십이 확보되어야 민중의 가족윤리도 명철하게 된다는 것은 정치의 기본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사도(斯道)’라는 표현도 선진고경의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감상 유교적 정통성을 의식한 표현이며 좀 후대의 용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의 선조인 공자의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주나라 왕실이 천하를 통제하는 집권적 권력을 이미 상실하여, 지방의 제후들이 무력으로 천하를 다투어, 도덕(道德)이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예의(禮誼, 禮義와 같다) 또한 폐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난역(亂逆)함이 도를 지나치지만 그것을 바르게 잡을 길이 없었다.
當吾先君孔子之世, 周失其柄, 諸侯力爭, 道德旣隱, 禮誼又廢. 至乃臣弑其君, 子弑其父, 亂逆無紀, 莫之能正.
 
그러므로 공부자께서는 늘 냉정하게 거처하시면서도, 세태를 탄하며 옛 효도의 훌륭함을 술회하시었다. 이에 부자께서는 선왕(先王: 중국문명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을 노나라의 수사(洙泗)곡부 지역의 두 개 천 이름, 공자가 태어나고 가르치고 서거한 지역에 펼치니, 문도(門徒)3천 명이나 모여들었고, 그 중에 경지에 달한 인물들만 해도 72명이나 된다.
是以夫子每於閒居, 而歎述古之孝道也. 夫子敷先王之敎於魯之洙泗, 門徒三千, 而達者七十有二也.
 
그 중에 수제자격인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등이 있지만 이들은 본성이 스스로 그러한 대로 지효(至孝)의 덕성을 발현하고, 모두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깨달을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 나머지 제자들은 입에 맴돌아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가슴에 초조함이 서린 채, 효도를 체현한 듯, 못한 듯 애매한 상태로 있었다.
貫首弟子, 顔回閔子騫冉伯牛仲弓, 性也至孝之自然, 皆不待諭而寤者也. 其餘則悱悱憤憤, 若存若亡.
 
그 중 오직 증삼(曾參)제자 그룹에서 어린 사람으로 공자 생애 말년에 공문에 들어왔다. ‘증자(曾子)’라 하지 않고 증삼이라고 한 표현은 공자 생시의 사태이므로 그를 낮춘 것이다. 뒤에는 증자로도 표현만이 보통 서민들의 효를 몸소 실천하기는 하였으나, 천자ㆍ제후 이하 양명(揚名: 자신의 이름을 날림) 현친(顯親: 부모님을 빛나게 함)의 일에는 미치지 못하여좀 표현이 어색하지만 효경본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다. 효경에는 효가 천자 - 제후 경대부 - 서인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증자가 서인의 효도는 실천하였지만 그 이상의 효도는 잘 몰랐기에 공자에게 묻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를 한가히 시좌(侍坐)할 수 있는 틈을 타서 공자께 효도에 관하여 여쭙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공부자께서 효의 마땅한 대목들을 일러주시었다. 이에 증자는 탄복하면서 효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증자는 곧 들은 것을 모아 기록하고 그것을 이름하여 효경이라 하였다. 증자가 기록하여 만든 효경은 오경(五經)과 더불어 세상에 나란히 행하여지게 되었다.
唯曾參躬行匹夫之孝, 而未達天子諸侯以下揚名顯親之事. 因侍坐而諮問焉. 故夫子告其誼, 於是曾子喟然知孝之爲大也. 遂集而錄之, 名曰孝經. 與五經竝行於世.

 

공안국(孔安國)은 생몰연대는 잘 모르지만 대대로 박사를 지낸 집안 사람이며, 전한의 무제(武帝)와 소제(昭帝)의 시기에 걸쳐 살았다. 무제 때에 박사였으며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천자의 과실을 간하는 역)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임회군(臨淮郡)지금의 안휘성 우이현(盱眙縣) 서북 80의 태수(太守: 군의 장관)가 되었다. 노나라 곡부의 사람이며 자()는 자국(子國)이다. 그의 형 공연년(孔延年)도 무제시기의 박사였으며 태부(太傅)ㆍ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다. 여기 오선군공자(吾先君孔子)’라는 표현은 공안국 자신이 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쓴 표현인데, 공안국은 공자의 직계 장손은 아니고 방계의 사람인데 공자의 12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공안국의 상서서(尙書序)에도 선군공자(先君孔子), 생우주말(生于周末)’이라는 표현이 있다.

 

효경』」이라는 책의 성립경위를 매우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내용인즉 다 효경에 들어있는 것이며 새로울 것은 없다. 자세하게 논하고 있지만 자세한 만큼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제일 마지막에 여오경병행어세(與五經竝行於世)’라고 한 것은 무제 당대에 말하기에는 좀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다. ‘오경(五經)’은 한 무제 때 비로소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생겨나면서 보편화된 개념이며, 당대에 곧바로 오경과 효경이 병행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가할 수도 있으나 좀 성급한 표현이다.

 

 

전국(戰國)의 육국(六國)()ㆍ초()ㆍ연()ㆍ한()ㆍ위()ㆍ조()이 각축(角逐)을 벌이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서울의 국학이나 지방의 향학이 모두 쇠퇴하여 폐()하게 되었다.
逮乎六國, 學校衰廢.
 
게다가 진나라의 시황제가 서적을 불사르고(시황제 34, BC 213), 지식인들을 생매장하는분서령 다음 해, 35, C 212, 주변 사람들이 황제의 행차동선을 일체 발설하지 못하게 한 법령을 어긴 제생(諸生) 460여 인을 매장한 구체적 범법처리 사건이며, 실제로 지식인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사태에까지 이르렀으니 효경은 이로 인하여 멸절되고 세상에 전하지 않게 되었다.
及秦始皇焚書坑儒, 孝經由是絶而不傳也.

 

효경의 전승이 단절된 역사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쇠폐(學校衰廢)’를 그 한 이유로 드는 것은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 의 저자는 효경을 관학의 전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교(學校)는 쇠폐(衰廢)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시기에 제자백가의 학풍은 더욱 크게 발흥하였던 것이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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