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한흥~금문효경야(至漢興~今文孝經也)
한(漢)나라가 흥하는데 이르러 무제(武帝)의 건원(建元) 초에 하간왕(河間王)이 안지(顔芝)의 아들 안정(顔貞)이 봉(奉)한 『효경』 1권을 입수하여 이것을 무제에게 헌상(獻上)하였다. 이것이 금문으로 쓰여진 18장본 『효경』인데, 문자에 오류가 많았다. 그러나 박사들이 퍽으나 이것을 좋아하여 교수(敎授)의 교재로 활용하였다. 至漢興, 建元之初, 河間王得而獻之. 凡十八章, 文字多誤. 博士頗以敎授. |
‘건원(建元)’은 한무제가 제정한 연호인데 중국역사에서 연호제도의 시작을 의미한다. 건원 원년이 BC 140년이다.
하간왕(河間王)이란 제6대 경제(景帝)의 제3자 유덕(劉德, ?~ BC 130)을 가리킨다. 한나라 종실의 사람들을 봉(封)하여 왕(王: 그러니까 지방의 영주 같은 개념)으로 삼는데, 유덕은 경제 2년(BC 155)에 분봉되어 하간왕(河間王)이 되었다. 하간은 현재 뻬이징(北京市)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남쪽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이다. 현재 하북성(河北省) 하간현(河間縣) 서남의 땅이다. 사람이 총명예지(聰明叡知)하며 수학호고(修學好古)하고, 민간에서 좋은 책들을 구하기를 좋아했는데, 좋은 책이 오면 반드시 여러 부를 필사하여 되돌려 주고, 또 진본은 비싼값을 주고 구입했다.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접하니까 사방에서 소장자들이 좋은 책들을 그에게 가지고 왔다. 그의 라이브러리에는 고문으로 된 선진구서(先秦舊書)들이 쌓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견지했으며 산동(山東)의 제유(諸儒)들이 그에게 몰려와 교유(交遊)하였다. 그가 죽자 그에게는 헌(獻)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그는 위대한 중국문화 스폰서였던 셈이다【안정이 『효경』을 세상에 내놓은 것과 하간왕의 입수는 50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하간왕이 헌상한 『금문효경』 18장본이 오류가 많다고 지적함으로써 고문효경의 등장의 필연성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후에 노나라 공왕(恭王)이 궁실을 개축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시켜 공부자께서 강의하시던 강당(講堂)을 헐게 했는데, 그 벽 속에서 돌로 된 함이 나왔고, 그 함을 열어 보니 그 속에 『고문효경』 22장본이 들어 있었다. 글씨들이 죽간에 쓰여져 있었는데, 죽간은 대략 길이가 1척 2촌이었고, 글씨의 자형은 올챙이(科斗: 과두蝌蚪) 모양이었다. 後魯共王使人壞夫子講堂, 於壁中石函, 得古文孝經二十二章. 載在竹牒, 其長尺有二寸, 字科斗形. |
노나라 공왕(魯恭王: 본문의 ‘共王’은 ‘恭王’을 의미함)이란 역시 노나라 지역에 분봉된 한나라 황실의 사람을 가리킨다. 경제(景帝)의 제5자로서 한 무제의 동생이다. 성은 유(劉), 이름은 여(余), 시호가 공(恭)이다. 노왕(魯王)에 봉하여졌다. 이 사람이 공자집을 고의로 허물은 것은 아니고 궁실이나 정원을 보수하고 가꾸는 데 취미가 있어, 공자집을 좋게 만들려고 일을 벌였을 것이다.
노나라의 삼로(三老)【주나라의 제도로서 천자가 대우한 지방의 원로인데, 진ㆍ한시대에는 지방의 교화를 담당한 관리였다】인 공자혜(孔子慧)【자혜(子惠)가 바른 이름이다. 뒤에 ‘子惠’로 나온다. 이력은 미상】란 인물이 이 죽간을 가지고 경사(京師)【서울을 의미하는데 당시는 장안(長安)】로 와서, 그것을 천자(天子)【당시의 천자는 소제(昭帝)였다】에게 헌상하였다. 천자(소제)는 금마문(金馬門) 대조학사(待詔學士)와 박사(博士) 등, 군유(群儒)로 하여금 과두문자의 고문을 당시에 알기 쉬운 예서 자체(字體)로 옮겨 쓰도록 하였다. 소제는 한 통을 공자혜에게 돌려 주었고, 또 한 통을 자기가 신뢰하는 시중(侍中)【황제의 최측근 요직】 곽광(霍光)【무제(武帝)ㆍ소제(昭帝)로부터 선제(宣帝)에 걸친 당대 최고의 권력 실세】에게 주었다. 곽광은 이 『고문효경』을 심히 사랑하여 말끝마다 이 『고문효경』을 화제로 삼았다. 魯三老孔子惠抱詣京師, 獻之天子. 天子使金馬門待詔學士, 與博士羣儒, 從隸字寫之. 還子惠一通, 以一通賜所幸侍中霍光, 光甚好之, 言爲口實. |
삼로(三老)란 주나라의 관제에 의하면 천자(天子)가 삼로(三老)ㆍ오경(五更)을 설치하여 부형(父兄)의 예로써 봉양하였다고 했는데, 삼로ㆍ오경이 각각 한 사람씩이었다는 설과 3인ㆍ5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진나라 때에는 교화(敎化)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향삼로(鄕三老)를 두었다. 서한 때에도 향삼로(鄕三老)와 현삼로(縣三老)를 두었다. 모두 1인씩이었다.
시중(侍中)은 진(秦)나라 때부터 생겨난 관명(官名)이다. 여기 ‘중(中)’이란 궁중을 마음대로 왕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원래 승상(丞相)의 사(史)였는데 전내동상(殿內東廂)을 왕래하면서 나라 일을 주상(奏上)하는 일을 관장했다. 서한시대에 들어와 가관(加官: 관위가 높아짐) 되어, 승여복물(乘輿服物)을 분장(分掌)하면서 중관(中官: 환관)들과 궐내에서 머물렀으며, 무제(武帝) 때부터는 점차 국사(國事)에 관여하고 황제 좌우에서 고문응대(顧問應對)의 일을 도맡아 중조(中朝: 조정 안)의 요직이 되었다.
‘금마문대조학사(金馬門待詔學士)’란 한대 미앙궁(未央宮)의 문이름에서 왔다. 문의 원래 이름은 노반문(魯般門)인데 문밖에 동마(銅馬)가 서있었기 때문에 금마문(金馬門)이라 불렀다. 문학의 선비들이 출사(出仕)하는 곳이다. 이 문에서 천자의 조(詔)를 기다려 고문에 응하였다.
곽광(崔光, ?~BC 68)은 평양(平陽)의 사람이며 한 무제가 가장 신임하였던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 ?~BC 117)의 이복 동생이다. 자는 자맹(子孟), 시호가 선성(宣成), 관은 대사마(大司馬)ㆍ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소제(昭帝)ㆍ선제(宣帝) 시기에 대권을 휘두른 인물이며 전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다.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중국역사서에 상세히 나온다. 그의 삶은 그 시대의 투영이므로 독자들이 자세히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
당시의 왕공귀인(王公貴人)들이 모두 『고문효경』을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고, 절묘한 묘약의 비방에 비유하여 숨기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천하의 사람들이 다투어 『고문효경』을 구하여 배우려고 하였지만 그것을 손에 쥘 길이 없었다. 뭇 나라로부터 사신이 노나라에 오게 되면, 곧 사람들과의 인연을 구실삼아 『고문효경』을 얻는 일을 청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호사가(好事家)들 중에는 금전과 비단으로 예서체로 필사한 『고문효경』을 많이 매입하여 그것으로 안부를 물으며 선물로 보내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나라의 관리가 제도(帝都)에 올 일이 있으면, 『고문효경』을 보따리 짐 속에 넣어 노잣돈으로 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고문효경』이 공씨집안에서 나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時王公貴人, 咸神祕焉, 比於禁方. 天下競欲求學, 莫能得者. 每使者至魯, 輒以人事請索. 或好事者, 募以錢帛, 用相問遺. 魯吏有至帝都者, 無不齎持以爲行路之資. 故古文孝經, 初出於孔氏. |
이 단에서는 『고문효경』이 세상에 유포된 경위를 말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좀 극화된 느낌이 있다.
그런데 금문 18장에 관해서는 제유(諸儒)들이 각각 제멋대로 다양한 교설(巧說: 말만 그럴싸하게 꾸며대는 설)을 펼쳐, 주장이 나뉘어져서 수가(數家: 여러 학파)를 이루었다. 이에 천박한 학자들이 『효경』 한 권이 육경(六經) 전체에 필적한다는 등, 그 허황된 설을 편 것이 너무도 방대한 분량에 이르러 거대한 수레에도 담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금문효경 신봉가들이 오히려 쓰잘데없이 뇌까리기를, 공씨집안에는 본시 『고문효경』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여 당시 사람들의 안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설 됨을 헤아려보니 사실무근의 낭설일 뿐이었다. 而今文十八章, 諸儒各任意巧說, 分爲數家之誼. 淺學者, 以當六經, 其大車, 載不勝. 反云孔氏無古文孝經, 欲矇時人, 度其爲說, 誣亦甚矣. |
이 단에서는 『금문효경』이 상당히 유행하여 많은 주석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금문효경 학파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고문효경』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안국은 『고문효경』의 가치는 사라질 수 없는 것임을 디펜드하고 있다. 즉 『금문효경』」이 현학(顯學)으로서 설치고 있는 상황에서 외롭게 『고문효경』에 대한 주석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공안국은 이와 같은 사태를 어엿비 여겨 발분정사(發憤精思: 분노를 발하고 사유를 정밀하게 함)하여 『고문효경』에 대한 주석[訓傳]을 쓰게 되었다. 『고문효경』의 본문을 완벽하게 빠짐없이 다 실었는데, 그 경문과 주석문의 글자를 다 합치면 1만여 자가 되었다. 경문(經文)은 빨간 주사(朱砂)로 쓰고, 전문(傳文)은 검은 먹[墨]으로 썼다. 이렇게 양자를 혼동치 않도록 확연히 구분함으로써 후세의 학자들이 『효경』의 올바른 경문텍스트와 정통의 주석이 모두 공벽의 고문에 있다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바라마지 않았다. 吾愍其如此, 發憤精思, 爲之訓傳. 悉載本文, 萬有餘言. 朱以發經, 墨以起傳. 庶後學者, 覩正誼之有在也. |
공안국이 『고문효경』의 전(傳)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경(經: 주서朱書)과 전(傳: 묵서墨書)의 모습에 관해서는 실제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 컴퓨터 ‘자료찾기(Data Search)’에 들어가 ‘청가정본(淸家正本)’을 찾아볼 것. 색은 구분 안 되어도 경과 전이 구분되는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궁중에서 도서를 관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나라 삼로, 공자혜(孔子惠)가 헌상한 『고문효경』을 정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하간왕(河間王)이 헌상한 『금문효경』은 비록 오류가 많아도 그것이 먼저 제출된 연고로 제국(諸國)에서 왕왕(往往) 유행하고 있다. 한나라의 선제(先帝: 여기서는 문제文帝ㆍ경제景帝ㆍ무제武帝)께서 조칙(詔勅)을 발표하실 때에 『효경』의 자구를 인용하실 경우가 있는데 모두 ‘전왈傳曰’이라고 하시면서 경문을 인용하시는데, 그 자구를 살펴보면 그것은 실로 금문효경(今文孝經)일 뿐이다. 今中祕書, 皆以魯三老所獻古文爲正. 河間王所上, 雖多誤, 然以先出之故, 諸國往往有之. 漢先帝發詔, 稱其辭者, 皆言 ‘傳曰’, 其實今文孝經也. |
이 단은 조정의 라이브러리 체계 속에서는 『고문효경』이 이미 정본으로서 그 권위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諸國)의 민간에서 아직도 『금문효경』이 설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금ㆍ고문 경전의 대립의식이 전한기에 이미 이토록 선명하게 개념화되어 부각되어 있었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더구나 ‘한선제(漢先帝)’라는 표현도 약간 이상하다. 한나라 때의 공안국이 썼다면 당대의 나라를 객관화시켜 ‘한(漢)’이라고 표현하는 용례는 가당치 않다. 위진시대에나 와서 가능한 용법이라 하겠다.
우선 ‘중비서(中秘書)’는 궁중 속에 서적을 수장하는 서각(書閣)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적을 관리하는 관원을 말한다.
다음 ‘전왈(傳曰)’이라고 말했을 때의 ‘전’은 주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만 해도 선왕의 서(書)만을 경(經)이라 했고, 『논어(論語)』나 『효경』 류는 전(傳)이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의 무제가 동방삭(東方朔)【무제 때의 명신(名臣)으로 뼈있는 골계가 뛰어났다】에게 일러 말하기를, ‘전왈 시연후언, 인불염기언(傳曰 時然後言 人不厭其言)’이라고 하여 『논어(論語)』 「헌문」【공명가(公明賈)의 공숙문자에 대한 평어】을 인용하였고, 성제(成帝)의 조서(詔書)에 ‘전왈 고이불위 소이장수귀야(傳曰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라고 하여 『효경』 「제후장」을 인용하는 사례가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한나라 ‘선제(先帝)’라고 하면 주로 문제(文帝)ㆍ경제(景帝)를 가리키는데, ‘전’이라고 하여 『효경』을 인용한 용례는 『사기』나 『전한서』에 보이지 않는다. 성제 때 단 한번 용례가 있는 것을 가지고 ‘개언(皆言)’ 운운하는 것도 뻥이 쎄다는 이야기다. 이것으로 ‘공전위작설’을 입증하는 학자도 많으나, 공안국이 실제로 이 「서」를 지었다면 우리가 모르는 선제(先帝)들의 조칙의 인용례를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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