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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민과 호학과 예와 사문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민과 호학과 예와 사문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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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과 호학과 예와 사문

 

 

()뿐만 아니라 (, 庶人)’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로 애매하고 유동적이다. 우선 논어에서 말하는 은 절대적인 다수의 대중을 종국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등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폴리스의 시민시민은 상민(常民, the common people), 군인(the soldiers), 수호인(the guardians)의 세 계층을 합친 개념과도 같이 광범위한 노예계층을 전제로 한 제한된 소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희랍의 민주제의 개념은 결코 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하는 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 우리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종국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맥락에 따라서 군() 앞에서는, 경대부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민의 개념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서 사민(士民)’이니 사졸(士卒)’이니 하는 표현은 대체적으로 장교와 졸병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는 특수한 기술을 보유한 지도적인 전사들이며, 민 즉 서인에서 차출된 전력은 대개 보병이나 치중대(輜重隊)의 노역을 제공하는 천역(賤役)의 사람들이었다.

 

공자세가(孔子世家)2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 청년시절의 일화, 즉 계씨의 문전에서 양호를 최초로 만나는 대화는 지극히 시사적이다.

 

 

계씨는 사를 대접하려 한 것이다. 감히 너 같은 놈을 대접하려는 것이 아니다. 끼웃거리지 말고 썩 꺼져라!

季氏饗士, 非敢饗子也.

 

 

이것은 공자가 모상(母喪) 중에 상복을 입고 계씨집 잔치에 나타났을 때 당한 봉변이다. 공자는 아무말 없이 굴욕을 참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孔子由是退].

 

이 양호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양호는 공자보다 약간 연배의 사람이며, 즉흥적으로 시운(詩韻)을 밟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문사(文辭)의 교양인이었다, 17세 전후의 공자는 도저히 로서 간주될 수 없는 수준의 천민이었다는 것이다. “계씨는 사를 향응하려 한 것이다. 너 같은 천한 놈을 향응하려 한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에 깔려있는 정조는, 곧 공자는 어렸을 때 라는 신분과는 거리가 먼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로서조차 간주될 수 없었던 천민, 송의 후예며 성인(무당)의 후예인 공자는 과연 어떻게 사의 최고지위인 대사구(大司寇)’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대부분의 선진(先秦) 전적에는 사구(司寇)’로만 되어 있다. ‘대사구(大司寇)’란 표현은 공자세가(孔子世家)의 창작일 수도 있다. 치엔 무(錢穆)는 사구에는 대()ㆍ소()의 구분이 있다고 한다. 대사구는 소사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이 논어, 논어속에 담긴 공자의 삶의 향기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공자의 삶에서 비로소 최초의 의 의미가 구현되어 나간 것이며, 공자를 통하여 의 의미가 새로 창출된 것이다. 공자는 사로서 간주될 수 없는 소년이었다. 이 미천한 소년이 사의 지도적 인물로 변화되어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공자의 호학(好學)’이다. 공자의 학의 대상은 ()’였다. 공자가 사를 지향한 배움으로서의 예는 곧 죽음의 예가 아닌 삶의 예였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예였던 것이다. 공자는 학을 통하여 예를 새롭게 창출했던 것이다.

 

공자가 예를 배웠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내가 멕시코 유카탄반도(Yucatán)의 치첸잇차(Chichén Itzá) 등지에 널려있는 석판의 판화를 보고 9세기경의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의례(儀禮)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도 유사하다. 공자가 재현하려 했던 것은 주공의 주례였다. 그러나 사실 소년 공자는 전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로칼한 당골네의 상례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고례의 담지자로서 공자의 자부감은 그의 호학(好學)의 행위로부터 얻어진 결과였다. 공자는 일찍 문자를 터득하였고 문헌을 연구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구전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끊임없이 물었다. 그는 물어서 배웠다[問而學], 그것이 공자의 사문(斯文)’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자부감은 당대의 지배계급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외경의 대상이었다. 실상 그것은 공자의 허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허풍은 진실한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정치적 권력의 기회를 허용하는 찬스였다. 그는 고례(古體)의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도덕적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꿈이 구() 한 사람의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행위였다는 사실이야말로 공자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공자는 도덕을 정치화(politicization of morality)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치를 도덕화(moralization of politics)하려 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집단적 노력이었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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