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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6. 힘이 부족하여 인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6. 힘이 부족하여 인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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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힘이 부족하여 인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

 

 

4-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아직도 인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인을 좋아하는 자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그런데 불 인을 미워하는 자는 그 인을 행함에 있어, 불인한 것이 자기 몸에 물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하루라도 그 힘을 인에 쓸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는가? 나는 그 인함에 쓸 힘이 부족한 인간을 본 적은 없다. 과연 그런 자가 있을 까? 나는 단연코 그러한 자를 본 적이 없다.”
4-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이 장에서는 주어가 ()’로 쓰이지 않았다. 모두 ()’로 되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이 편집의 패턴을 어떻게 결정하고 있는지는 단정키 어렵다. 아마도 ()’는 보다 실존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말일 것이다. 전체적인 의미는 쉽게 포착이 되는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부적 논의는 확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나의 주관적 느낌에 의존하여 풀 수밖에 없다.

 

아미견(我未見)’이라는 표현은 매우 실존적이면서도 풍자적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이 내 두 눈으로 아직 확인해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강력한 실존적 단정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무엇을 보지 못하였나? 공자가 보지 못한 것은 다음의 두 종류의 인간이다.

 

한 인간의 유형은 인을 좋아하는 사람[호인자好仁者]이다. 또 한 인간의 유형은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오불인자惡不仁者]이다. 인을 좋아하는 사람[호인자好仁者]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오불인자惡不仁者]은 모두 공자에게서 높이 평가되는 인간의 두 유형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 두 유형의 인간을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호인자(好仁者)는 인이라는 덕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오불인자(惡不仁者)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호인자만으로 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불인자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호인자(好仁者)의 진정한 상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즉 호인자는 오불인자(惡不仁者)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칸트의 말대로 최상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상선이란 그 이상의 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상에 더 보탤 것이 없는 완전함이다. 이것을 공자는 무이상지(無以尙之,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호인자로써만 운영되지 않는다. 오불인자(惡不仁者)의 실천적 행위 또한 중요한 것이다. 인하지 못한 것을 증오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호인자의 침묵보다 오불인자의 증오의 함성이 때로 인간세에 더 강렬하게 인의 가치를 구현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불인자의 방법론은 보다 소극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인함이 자기 몸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불인함을 경계함으로써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호인(好仁)과 오불인(惡不仁)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루라도 인에 힘을 쓰는 자가 있는가[유능일일용기력어인의호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이 표현은 이 표현만으로 독립시켜 보면 해석이 심히 어렵다. 하루라도 제대로 인을 실천하는 자를 볼 수가 없다는 탄식으로 풀어야 할까? 그러나 이 표현은 전혀 독립 구문으로서는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구문은 단지 그 다음에 연결되는 나는 힘이 부족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아미견역부족자(我未見力不足者)]’라는 구문의 조건절로서, 가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루라도 인에 힘을 쓰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힘이 부족해서 인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게으른 변명은 통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공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곧 네가 선의지를 실천하려고만 한다면 실천할 수 있다는 명령이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이 해야만 한다고 의식하면 곧 할 수 있는 것이다(Du kannst, denn du sollst. 이것은 원래 쉴러를 통해 유명해진 말인데 그 정확한 출전은 실천이성비판54에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의 명증이다. 주자는 말한다.

 

 

대저 인을 실천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바로 되는 것이다. 뜻이 이르는 곳에는 기운이 반드시 같이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이 비록 능하기는 어려우나 이르기는 또한 쉬운 것이다.

蓋爲仁在己, 欲之則是, 而志之所至, 氣必至焉. 故仁雖難能, 而至之亦易也.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여건과 나의 성실한 노력과 재주와 시대적 상황(시운)의 모든 여건이 맞아 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의 실천은 이러한 객관적 여건의 구비나 불비를 막론하고 나의 의지로부터 절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시(何時)고 어느 상황에서든지 역부족(力不足)’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역부족(力不足)’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이 아니다.

 

마지막 구문, ‘개유지의(蓋有之矣), 아미지견야(我未之見也)’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바로 앞의 구문을 받아 그 논지를 단호하게 강화시키는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힘이 부족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 힘이 부족한 자가 혹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난 그런 인간은 단연코 본 적이 없어!

 

또 하나의 해석은 개유지의(蓋有之矣)’를 이 장의 논지 전체를 받아, 한 번 그 풍자적 논조를 느슨하게 양보하는 척 하다가 오히려 다시 그 풍자적 논조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다산의 해석이 이에 가깝다. 항상 인에 힘쓰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아직 그런 훌륭한 인간을 만나지 못했단 말야!

 

마지막 해석은 유능일일(有能一日)’ 이하의 구문들을 모두 오불인자 (惡不仁者)’불인자(不仁者)’를 주체로 하여 전개된 문장으로 보는 것이다. 설사 불인한 자라 할지라도 하루라도 인에 힘쓰기만 한다면 힘이 부족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카이즈카 설).

 

 

()’()’가 모두 거성이다. 부자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미견호인자(未見好仁者), 오불인자(惡不仁)’라고 하시었다. 대저 호인(好仁)’이라고 하는 것은 인이 좋아해야 할 것임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일이 그것보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오불인(惡不仁)’이라고 하는 것은 불인이 미워해야 할 것임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행함에 반드시 불인한 일을 끊어내어 버려서 조금이라도 자기 몸에 미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 중의 양자는 모두 덕을 완성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인간을 다 얻어 보기 어려운 것이다.

, , 皆去聲. 夫子自言未見好仁者, 惡不仁者. 蓋好仁者眞知仁之可好, 故天下之物無以加之. 惡不仁者眞知不仁之可惡, 故其所以爲仁者, 必能絶去不仁之事, 而不使少有及於其身. 此皆成德之事, 故難得而見之也.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비록 볼 수 없다 해도, 어떤 사람이든 하루 아침에 분연(奮然)히 인에 힘을 쓴다면, 그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인을 실천한다는 것은 나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실천하고자 한다면 바로 실천되는 것이니, 뜻이 이르는 곳에 기()가 반드시 따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이란 능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에 이르기는 또한 쉬운 것이다.

言好仁惡不仁者, 雖不可見, 然或有人果能一旦奮然用力於仁, 則我又未見其力有不足者. 蓋爲仁在己, 欲之則是, 而志之所至, 氣必至焉. 故仁雖難能, 而至之亦易也.

 

()’라는 것은 의문사(疑辭: ‘아마도정도의 뜻)이다. ‘유지(有之)’라는 것은 인에 힘을 씀에 있어서 힘이 부족한 자가 있음을 일컫는다. 대저 인간의 기질(氣質)이 고르지 아니 하매, 혼약(昏弱)함이 심하여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신 것이다. 그러나 당신께서 여간해서 그런 사람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사람들이 종내 인에 힘쓰는 것을 쉽게 여기지 아니 하고 인에 최선을 다하려 하지 않음을 개탄하신 것이다.

, 疑辭. 有之, 謂有用力而力不足者. 蓋人之氣質不同, 故疑亦容或有此昏弱之甚, 欲進而不能者, 但我偶未之見耳. 蓋不敢終以爲易, 而又歎人之莫肯用力於仁也.

 

이 장의 대의는 다음과 같다. ()의 덕을 이룸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어렵다고 할지라도, 배우는 자가 실제로 그 힘을 쓰기만 한다면 도달치 못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단지 힘을 쓰는데도 도달치 못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곧 부자께서 반복하여 탄식하신 까닭이다.

此章言仁之成德, 雖難其人, 然學者苟能實用其力, 則亦無不可至之理. 但用力而不至者, 今亦未見其人焉, 此夫子所以反覆而歎惜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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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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