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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5. 군자여 어느 순간에도 인(仁)을 해야 한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이인 제사 - 5. 군자여 어느 순간에도 인(仁)을 해야 한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2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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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군자여 어느 순간에도 인()을 해야 한다

 

 

4-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귀는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빈천은 누구나 다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군자가 인함에서 떠나 있다면 어찌 명예로운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는 한 끼니를 마칠 시간 동안에도 인을 어기는 법이 없다.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인과 더불어 하며, 실족할 때에도 반드시 인과 더불어 할 뿐이다.”
4-5. 子曰: “富與貴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조차(造次)’란 고주에 급거(急遽)’라 했으니 무엇인가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황급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위급하고 황급하고 황망한 삶의 시간을 묘사한 말이다. 주자는 급거구차지시(急濾苟且之時,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때)’라 했으니 결국 고주를 부연설명한 것이다. ‘조차(造次)’가 의성어에서 유래 된 것일 수도 있으나 그 자의(字意) 새겨보면 그 순서가 뒤죽박죽되었다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전패(顚沛)’는 고주에 강부(僵仆)’라 했다. 문자 그대로 풀면 몸이 굳어 넘어진다, 쓰러진다는 뜻이다. 주자는 경복유리지제(傾覆流離之際, 기울어 엎어져 흘러가는 때)’라 했으니 역시 고주를 풀이한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중심을 잃고 기울어 쓰러져 정처없이 표류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조차(造次)나 전패(顚沛)나 모두 그러한 우리 인생의 시련기나 위기상황을 말하는 것이니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바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 바로 그에 상당하는 표현일 것이다.

 

부귀는 인간이 모두 원하는 것이요, 빈천은 인간이 모두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쾌락을 좋아하고 불쾌를 싫어한다는 매우 원초적인 자연적 사실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자연적인 사태가 인간에게 정당한 삶을 유지시켜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불쾌를 싫어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쾌락적인 삶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모든 쾌락의 추구는 결국 불쾌를 초래하고 만다는데 그러한 쾌락적 삶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술을 먹고 몽롱한 분위기에 있는 시간은 마냥 즐겁기만 하고 이 세상만사가 다 구찮은 듯이 보인다. 허나 금준미주만 골라 먹고 살 수 있는 부귀가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술을 지속적으로 마신다는 것은 결국 신체적으로 불쾌한 후유증이 뒤따르게 마련이요, 온갖 질병이나 판단미숙으로 오는 재앙이 주변에 잇따라 생겨나게 될 것이다. 식색의 모든 즐거움이 이와 같은 불건강을 초래한다는 데 그 자연주의적 한계가 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귀는 좋은 것[인지소욕(人之所欲)]이지마는, 그 좋음이 좋음으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좋음이 참으로 좋음의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도덕성을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 것이다: “부귀는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라고.

 

그런데 이에 짝지어지는 빈천의 문제도 공자는 동일한 대구적인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견 그 의미가 우리에게 석연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부여귀(富與貴) 빈여천(貧與賤)
인지소욕(人之所欲) 인지소오(人之所惡)
불이기도지지(不以其道得之)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
불처(不處) 불거(不去)

 

결국 이 대구의 정확한 의미를 문자 그대로 즉 축어적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빈천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축어적(逐語的) 해석은 영 그 논리적 이미지가 확연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부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人之所欲]이요,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人之所惡]이라는 주장은 매우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데 인간세에 있어서, 부귀는 소수의 현실이요, 빈천은 다수의 현실이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빈천하게 살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빈천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적 과오로 인하여 당연히 빈천해야 할 상황에서 빈천한 삶을 영위하는 현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빈천한 사람들이 그러한 실존적 과오가 없이도 그냥 빈천한 운명에 처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생명은 부귀한 고대광실에서 태어나고, 어떤 생명은 엄동설한에 구멍탄 한 장을 피울 수 없는 판잣집에 서 태어난다. 그 판잣집에서 태어난 생명에게 빈천의 실존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공자는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라 표현한 것이다. 즉 그러한 빈천은 결코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결과가 아닐지라도, 그러한 빈천을 구차스럽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와 같이 번역했다: ‘그것이 비록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깔려있는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이 산다고 하는 문제가 부귀에 처하거나, 빈천을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귀빈천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빈천은 부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법칙이다. 부귀라든가 빈천이라 하는 것은 어떤 고정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인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공자는 말한다. 인간이 인함을 버린다면 어찌 그 인간다운 이름을 이룰 수 있으리오[오호성명(惡乎成名)].

 

여기 공자가 제시하고 있는 언어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은 우리 인간세의 현실적 삶의 모습에서 우리의 도덕적 삶과 행복이 불일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우리의 도덕적 의지나 덕스러운 삶이 결과적인 행복과 비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극적 사실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빈천을 도()로써 얻지 않았다는 표현의 핵심적 의미인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도덕법은 그 자체로 어떠한 행복도 약속하지 않는다. 자연질서 일반의 개념상으로, 행복은 도덕법을 준수하는 일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실천이성비판231).

Aber das moralische Gesetz für sich verheißt doch keine Glückseligkeit; denn diese ist, nach Begriffen von einer Naturordnung überhaupt, mit der Befolgung desselben nicht notwendig verbunden.

 

 

다시 말해서 도덕법과 행복의 관계는, 포물선 법칙과 던진 돌멩이의 행로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멩이의 행로는 포물선 법칙에 따라 예측된 길을 필연적으로 따라가지만이것은 곧 순수이성의 세계다, 인간의 행복은 도덕법의 준수에 따라 비례적으로 결과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실천이성의 불확정성이요 비극이다. 그것은 필연을 뛰어넘는 물자체의 불가지론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해결을 위해 칸트는 신을 요청한다.

 

 

그런데 동일한 도덕법은, 최고선의 둘째 요소인 도덕법에 적합한 행복의 가능성에 역시 공평하게, 치우치지 않는 이성에 의하여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즉 행복을 결과하기에 충분한 원인 즉 하나님이 생존하신다는 전제로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 (이것은, 순수이성의 도덕적인 법칙수립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우리의 지의 목표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223~224).

Ebendieses Gesetz muß auch zur Möglichkeit des zweiten Elements des höchsten Guts, nämlich der jener Sittlichkeit angemessenen Glückseligkeit, ebenso uneigennützig wie vorher aus bloßer unparteiischer Vernunft, nämlich auf die Voraussetzung des Daseins einer dieser Wirkung adäquaten Ursache führen, d.i. die Existenz Gottes als zur Möglichkeit des höchsten Guts (welches Objekt unseres Willens mit der moralischen Gesetzgebung der reinen Vernunft notwendig verbunden ist) notwendig gehörig postulieren.

 

 

인간이 체험하고 있는 현실은 비록 나의 덕성과 행복이 비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 나의 덕성에 비례하여 행복이 일치하도록 만드는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의 기반이 없으면, 나의 현세적 선행은 가치기반을 상실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존재가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실존은 나의 선행과 행복의 궁극적 일치를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은 순수 이성의 필연적 사실이 아닌,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를 나의 자율적인 의지로서 명령하는 나의 존재의 불가지론적 심연이다.

 

공자는 하나님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공자는 인 그 자체를 요청한다. 그러나 종교를 철저히 이성의 범위 속에 제약시키는 한에 있어서는, 공자의 인에 대한 무제약적인 요청이나 칸트의 신의 실존에 대한 요청은 실제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가 잠시라도 인을 떠난다면 어찌 우리가 그를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군자거인君子去仁, 오호성명惡乎成名]. 여기 공자가 말하는 성명(成名)’이란, 인간이 인간다움을 이룩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간의 노동을 거친 모든 물건은 교환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는 교환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 그 자체는 가치로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귀한 것은 바로 인간만이 자율적인 도덕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지울 수 있는 자율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존엄성을 유교에서는 성인의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성인의 가능성을 구유(具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인의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는 본성의 내재적 사실이 바로 인()이다. 그런데 인이란 칸트에게 있어서처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이성의 논리적 산물만은 아니다. 인이란 인간의 심미적 감성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어떤 도덕적 경향성이다. 인간이 이 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공자는 말한다. 한 끼의 식사를 끝낼 그러한 짧은 시간동[종식지간終食之間]에라도 군자는 인에서 어긋나는 법이 없다. ‘종식지간(終食之間)’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당시에 짧은 시간 단위를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었을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인은 밥을 먹고 있는 중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는 소박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즉 일용기거(日用起居)의 삶의 모든 순간에도 우리는 인에서 어긋나게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먹고 싸고 잠자고 말하는 모든 일상적 행위가 곧 인이 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조차(造次)ㆍ전패(顚沛)의 한계상황에서도 반드시 인간은 인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필어시必於是].

 

이 장이 만약 공자의 초기어록의 파편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러한 파편은 안회의 기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회의 기록이 자공에게 전달되어 전승된 것일 수도 있다. 공자와 조차(造次)ㆍ전패(顚沛)의 수많은 삶의 역경을 같이 나누었던 애제자 안회만이 이러한 공자의 심정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 었을 것이다. 조차(造次, 예기치 못했던 황당하고 황급한 상황들)ㆍ전패(顚沛, 갑작스런 좌절 속에 표류하는 상황들)의 고뇌 속에도 오로지 인함의 삶을 고집하는 공자의 숭고한 실존의 모습을 우리는 생생하게 이러한 안회의 기록을 통하여 전달받게 되는 것이다.

 

 

()’는 거성이다.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라는 것은, 마땅히 얻어서는 아니 될 것을 얻은 것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부귀에 있어서는 처하지 아니 하고, 빈천에 있어서는 버리지 아니 하니, 군자가 부귀를 조심히 살피고 빈천에 편안히 거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 去聲. 不以其道得之, 謂不當得而得之. 然於富貴則不處, 於貧賤則不去, 君子之審富貴而安貧賤也如此.

 

 

주희의 해석과 나의 해석은 약간의 출입이 있다.

 

 

()’는 편성이다(감탄사, 어찌 오). 공자님의 말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군자된 까닭은 그 인함 때문이니, 만약 부귀를 탐하고 빈천을 싫어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 인함을 떠나버려 군자의 실()이 없는 것이다. 어찌 그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

, 平聲. 言君子所以爲君子, 以其仁也. 若貪富貴而厭貧賤, 則是自離其仁, 而無君子之實矣, 何所成其名乎?

 

는 칠도(七到) 반이다. ‘()’라고 발음한다. 종식(終食)’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밥 먹는 시간이다. ‘조차(造次)’주희는 초차로 읽었다. cao-ci. 그러나 관례적으로 조차로 읽어 무방하다라는 것은 황망하고 구차스러운 시점이요, ‘전패(顚沛)’는 낭패하여 모든 것이 유리(流離: 흩어져 버린다)하는 절망적 상황이다. 군자가 인을 떠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인과 더불어 함은 단지 부귀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사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七到反. , 音貝. 終食者, 一飯之頃. 造次, 急遽苟且之時. 顚沛, 傾覆流離之際. 蓋君子之不去乎仁如此, 不但富貴貧賤取舍之間而已也.

 

군자가 인을 실천하는 것은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사이로부터 밥먹는 사이, 조차전패의 황망한 경각에도, 장소ㆍ시간을 가리지 않고 힘을 쓰지 않음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취사의 구분이 명료하여진 후에야 존양(存養)의 공부가 치밀해질 것이니, 양의 공부가 치밀해지면 취사의 구분 또한 더욱 명료하여질 것이다.

言君子爲仁, 自富貴, 貧賤, 取舍之間, 以至於終食, 造次, 顚沛之頃, 無時無處而不用其力也. 然取舍之分明, 然後存養之功密; 存養之功密, 則其取舍之分益明矣.

 

 

주희의 설명이 좋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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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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