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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동양사 - 1부 태어남, 2장 인도가 있기까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동양사 - 1부 태어남,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건방진방랑자 2021. 6. 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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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면서부터다아리아인은 원래 언어학상의 용어로, 정식 명칭은 인도 유럽어족이다. 하지만 거기서 전성되어 인종적인 의미로도 사용하므로 종족의 이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아리아인을 인종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유명하다. 유럽으로 간 아리아인은 수천 년 뒤에 로마를 침공한 게르만족의 조상에 해당한다. 독일 민족 순혈주의에 빠진 히틀러는 고대 아리아인을 숭배하고 미화했다. 거기까지는 뭐라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유대인 학살은 명확한 인종주의적 범죄다. 혹시 그는 고대의 자기 조상들이 셈족에게 밀려났다고 여겨 역사적 복수를 시도한 걸까? 고대의 민족이동에서 아리아인은 인도를 정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대인의 조상인 셈족이 장악하고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피해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아리아인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인데, 기원전 18세기 ~ 기원전 17세기부터 대이동을 시작했다. 이동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의 기후가 변화하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환경이 달라지자 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인도까지 온 것이다.

 

아리아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이동했는데, 한 무리는 인도 방면으로 진출했고, 다른 무리는 서아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 지역으로 이동했다. 유럽으로 간 아리아인은 오늘날 유럽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 증거는 인종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유럽 백인의 인종적 조상은 중앙아시아의 캅카스인이며,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는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인더스 문명의 목욕탕. 모헨조다(Mohenjo-Daro)로 유적의 목욕탕 부분이다. 당시의 목욕이란 오늘날처럼 생활 습관으로 한 게 아니라 제사장이 제사를 올리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한 행위였다. 제사장은 가운데 계단으로 내려와 수조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탕 벽면에 촘촘히 쌓아올린 벽돌들은 당시의 건축술이 3000년 뒤의 고대 로마에 못지않았음을 보여준다.

 

 

인더스 문명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아인은 문명보다 무력에서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정착 문명의 수준은 보잘것없었으나, 아리아인은 그 당시에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이라면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철기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것은 단기간에 작정하고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정착 생활을 했다. 여기서 농경 생활을 익힌 그들은 이윽고 유목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도 중부 지역과 동부 갠지스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당연히 원주민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원주민의 대표적인 부족은 드라비다인이었다. 그러나 양측의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오늘날의 서구인에게서 보듯이 우세한 체력 조건에다 철기를 지닌 막강한 유목민족 출신에게 작은 체구에 청동제 무기밖에 없는 농경민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을 정복하고서 함께 어울려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아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아예 제도로 확립했다. 그것이 바로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다.

 

 

 

 

바로 그 무렵 중국에 존재한 은나라는 제사를 받들 때 언제나 은 왕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변 부족들과 함께 공동으로 지냈다. 또 은의 뒤를 이은 주나라는 이민족 오랑캐를 정복하고 나서도 제후 자신이 직접 제사장을 맡아 토착민의 신을 받드는 제사를 올렸다. 토착민의 지역신은 사()였고, 농업신은 직()이었다. 이것이 후일 합쳐져서 한 왕조를 가리키는 사직(社稷)이라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 왕들은 자기 조상을 받드는 종묘(宗廟)와 피정복민의 문화에서 비롯된 사직을 함께 지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이것이 곧 중화의 원리다).

 

그러나 아리아인은 피정복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카스트 제도로 노골적인 신분 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인도는 단순한 신분제를 넘어 철저한 계급사회가 되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 카스트 제도가 오늘날까지도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스트는 모든 사람을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iya), 바이샤(vaiya), 수드라(Sudra)의 네 가지 계급으로 구분했다(반드시 네 가지만은 아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브라만을 제외한 모든 계급을 수드라로 구분하기도 했다). 최고 신분인 브라만은 사제 계급으로 종교의식을 담당했고, 크샤트리아는 귀족과 정치적 지배층, 군인 계급이었으며, 바이샤는 농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평민, 최하층 수드라는 노예 계급이었다. 이 가운데 상위 세 계급은 아리아인이었고, 원주민은 모조리 수드라였다. 즉 원주민의 최상층도 아리아인의 최하층만 못했으니 얼마나 철저한 차별 제도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보편적 인권의 관념이 생겨난 근대 이전까지 모든 인류 사회는 신분제를 취했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카스트 사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라면 당연히 정치와 군사의 지배층이 제1신분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의 최고 지배층은 사제 집단인 브라만이었고, 이들이 정치적 지배층인 크샤트리아를 통제했다. 이점은 고대 인도가 종교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고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인도에서 종교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아리아인의 이동 경로.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가 고향인 아리아인은 일찍부터 철제 무기를 가졌던 수수께끼의 민족이다.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남쪽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로 왔다. 서쪽으로 간 아리아인은 터키를 지난 다음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까지 남하해 그리스의 원주민들과 어울려 미케네 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 전 12세기에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도리스인도 아리아인의 후예일 것으로 추측된다. 까마득한 고대에도, 느리기는 하지만 대규모 민족이동이 있었고 동서 교류도 있었다.

 

 

인도와 종교

 

 

인도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종교다.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종교를 떼어놓고는 인도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인도에서 종교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현재 인도는 힌두교(브라만교를 모태로 하고 있다) 국가이기 때문이다(힌두와 인도는 같은 어원이니, 힌두교는 결국 인도의 전통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인도 서쪽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한 몸이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종교 문제로 분리되었다. 또 인도 동쪽의 방글라데시도 이슬람 국가다. 그래서 현재 인도 아대륙 주변에서 불교 국가로 남아 있는 나라는 스리랑카뿐이다. 오히려 타이나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서아시아와 인도에서 종교는 곧 생활이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나라처럼 종교를 단순한 신앙의 측면에서 선택 사항으로만 여기는 곳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리스도교 역시 서구인들에게는 신앙이기에 앞서 생활 방식에 가깝다서부 개척 시대에 미국인들이 한 마을을 개척할 때 맨 먼저 교회부터 세운 것은 교회가 종교 시설이라기보다 마을 공회당 같은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종교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종교를 떼어놓고 생각하면 인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지배하게 된 역사에 관한 기록도 그들이 남긴 베다(veda)라는 일종의 종교 문헌에서 나왔다. ‘성스러운 지식이라는 뜻의 베다는 시집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마디로 베다는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다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문헌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리그베다(Rig- Veda). 이 문헌에는 신을 찬양하는 송가 1028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가들을 통해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역사와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리그베다(Rig- Veda)에서 보는 고대 인도의 모습은 형식상으로 군주제를 취하기는 했지만 종교가 세속의 권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사회였다. 왕은 자기 영토를 소유하지 못했으며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지도 못했다. 다만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전리품만은 가질 수 있었다. 왕보다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제인 브라만 계급이었다.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기원전 600)에는 왕권이 한층 강화되지만, 그래도 종교의 권력에 미치지는 못했다.

 

리그베다(Rig- Veda)의 종교는 자연 숭배의 형태를 띤 원시적 다신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후기 베다 시대에 접어들면 종교적 초점이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점차 인간의 문제로 이행하고 신의 성격도 달라진다. 그에 따라 브라만교의 형식적인 종교 의식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을 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등장한 철학을 우파니샤드(Upanisad, ‘비밀 모임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우주는 브라만()이며 브라만은 아트만(ātman, 자아)이다. 내가 곧 우주가 되는 이른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뒤이어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는 그토록 막강했던 브라만교의 권위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종교들이 생겨났다. 이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들이 불교와 자이나교다. 불교와 자이나교가 기존의 브라만교에 도전하면서 이후 인도는 그 세 가지 종교를 정신적 축으로 삼고 발전하게 된다. 당시의 신흥 종교였던 불교와 자이나교를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불의 신. 아그니 신은 리그베다(Rig- Veda)에 등장하는 불의 신으로서,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그 밖에 리그베다(Rig- Veda)의 주요 신들로는 전쟁을 관장하는 인드라, 우주의 질서를 유지

하는 물의 신 바르나 등이 있다.

 

 

불교(佛敎)

 

불교를 창시한 석가(釋迦,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언저리에 있었던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당시는 아직 영토 국가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많았는데, 카필라도 그중 하나였다.

 

싯다르타는 열여섯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평온하게 살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당시 출가는 널리 행해지던 사회적 관습이었으므로 출가 자체로 싯다르타의 사람됨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후 그는 6년여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현인들을 만나고 온갖 고행을 하지만, 애초부터 그가 품고 있던 생로병사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명상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했다. 7일간의 좌선(49일이라는 설도 있다) 끝에 그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고, 자신을 스스로 붓다(부처, Buddha, 佛陀 등으로 표기하는데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라고 불렀다. 이후 석가는 45년간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널리 전파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그가 열반에 들자, 중생을 구제하려는 그의 염원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졌으며, 불교라는 심원한 종교로 확립되었다.

 

흔히 불교라고 하면 윤회나 업() 같은 개념들을 연상하지만, 원래는 그것들도 불교 이전에 힌두교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이다. 석가 역시 윤회와 업을 불교 속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유신교, 그것도 다신교인 반면에 불교는 처음에 무신교로 시작했다부처는 신이 아니라 선각자일 뿐이다. 부처가 일종의 신과 같은 성격을 지닌 존재로 변하는 것은 후대에 대승불교의 발달로 불교가 체계적인 종단의 구조를 지니게 되면서부터다. 따라서 힌두교는 신을 윤회보다 상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불교는 신성(神性) 자체가 선행의 결과라고 보았다.

 

불교는 이렇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전통적인 카스트 제도도 부정했다. 불교의 만민 평등사상에서 보면 하층계급도 얼마든지 해탈에 이를 수 있었다. 불교는 가히 혁명적인 종교였다. 그렇게 보면 이후 불교가 인도에서 계속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인도에는 카스트가 살아 있으니까. 이후 불교는 포교 종교로 전환되면서 부처를 신처럼 받들기 시작했고 종단 조직을 갖추었다. 종교가 조직으로 성장하고 발달하면 내용적으로는 타락하기 쉽다. 불교는 얼마 안 가 본래의 혁명성을 잃었다.

 

 

고행하는 부처. 간다라 지방에서 발굴된 불상이다. 싯다르타는 몇 년간의 고행을 청산하고 7일간의 좌선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에서는 고행의 고통과 좌선의 평안이 느껴진다.

 

 

자이나교(Jainism)

 

 

자이나교도 힌두교나 불교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답게 윤회와 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교리는 힌두교보다 불교와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우선 베다성전의 권위를 부인한 데다 종교 의식을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배척했으므로, 자이나교 역시 불교처럼 힌두교 질서에 반발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불교에서처럼 금욕을 강조하고 불살생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그 점에서 불교보다 한층 극단적인 성격을 지녔다.

 

자이나교의 5대 계율은 살생, 거짓말, 도둑질, 음행, 소유의 다섯 가지를 금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었는데, 그 대상으로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바람이나 물, , 불까지도 포함시켰다. 자연의 모든 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해충을 잡고 잡초를 뽑고 익은 작물을 베어내 수확하는 농민들도 큰 죄를 짓는 셈이 되었다. 그래서 자이나교의 신도들은 주로 농업보다 상업을 택했다. 자이나교도는 주로 상업과 대금업,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해 대다수 종교들이 대금업을 죄악시하는 데 비하면 자이나교는 특이하다). 그 덕분에 19세기 이전까지 자이나교도는 인구로 보면 인도 전체의 1퍼센트도 안 되었으나 총 자본량의 절반 이상을 소유했다.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 정도는 보편적인 도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죽이거나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하고, 철저한 금욕과 무소유로 생활하라는 것은 곧 괴롭게 살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을 거쳐야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럼 해탈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걸까? 그것은 윤회. 영혼은 자신이 지닌 업 때문에 결박되어 있고 부단히 고통 속에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 영원한 고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게 바로 해탈이다. 가장 순수한 해탈은 육신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고행과 육신의 죽음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자이나교의 극단적인 교리는 원래 종교적 심성이 강한 고대 인도인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고대 인도에서는 전통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가 성행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평등사상을 주창하며 무신론이라는 점에서 대략 색깔이 비슷한 종교였다. 그에 비해 힌두교는 다신론 종교였으며, 카스트 질서를 만들고 고착시켰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인도는 대표적인 힌두교 국가. 불교는 한동안 크게 융성하다 4세기 무렵 굽타 왕조 시대부터 힌두교에 밀려 인도에서 물러났다. 역사는 발전하게 마련인데, 왜 불교와 자이나교는 진보적이었음에도 힌두교에 패배했을까? 누가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카스트 제도의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종교가 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윤회 사상 때문이었다. 윤회는 인도의 모든 종교에 내재한 전통적인 관념이다. 윤회를 믿는 인도인들은 지금 비록 노예의 처지라 해도 꾹 참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다음 세상에서는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굳이 현재 삶에서 평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다른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힌두교가 문제 많은 종교인 듯하지만, 인도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후 윤회의 관념이 없는 동남아시아 지역과 동북아시아의 중국, 한반도, 일본 등지에서 더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불교의 알맹이라 할 윤회를 떼어버리고 껍데기만 받아들였기에, 윤회의 자리를 국가로 채워 호국 불교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돌 도장.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에서는 모두 살생을 금지했다. 특히 힌두교에서 소를 숭배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돌 도장은 기원전 2000년 무렵의 것인데, 이미 이때에도 인도인들에게 소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을 보면 힌두교의 역사는 인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카스트 제도가 처음 성립할 때와 같은 강력한 힘을 이후에도 내내 발휘했다면, 인도에는 고대국가의 성립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신분 질서가 워낙 강한 탓에 국가라는 질서의 중심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카스트의 힘은 점차 약해졌다.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인도 원주민이 외양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나서 카스트의 구분도 쉬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융화되면서 인종적 구별이 사라져 직업으로 카스트를 구분해야 했다(코가 뾰족하고 눈동자와 피부색이 검은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아리아인과 원주민이 혼혈을 이룬 결과다).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면서 그에 반비례해 각 도시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원시적 공화정과 같이 부족장들의 원로 회의가 국가를 지배하고 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으나(심지어 왕이 세습되지 않고 부족 연맹에서 선출하기도 했다), 점차 강력한 왕권을 지니는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마가다, 비데하, 코살라, 아반티, 앙가 등 10여 개에 이르는 주요 왕국들이 갠지스 강 유역을 따라 퍼져 있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해당하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인도에서도 여러 도시국가가 각축전을 벌였다. 특히 마가다는 빔비사라 왕과 그 아들 아자타사트루의 지배기에 코살라와 비데하를 병합하고 북인도를 거의 석권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의 역사가 이대로 지속되었더라면 마가다가 인도를 통일하는 최초의 왕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다의 세력이 커지던 기원전 4세기에 인도의 서쪽에서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그리스에서 출발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 서북부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최고의 카스트. 브라만 승려의 모습이다. 사실 브라만 승려는 귀족보다 신분이 높았다. 현실 정치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는 인도 특유의 관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인도를 가장 먼저 침공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였다. 한때 그는 펀자브 지방을 점령해 통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였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가 세상의 동쪽 끝이라 믿었고, 인도를 정복하면 아시아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히말라야를 넘기는 어려웠겠지만 혹시 인도를 침공한 뒤에도 동방 원정을 계속했더라면 전국시대 말기 한창 강성했던 진() 제국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동쪽 끝을 정복한 뒤 말머리를 돌려 멀리 세상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원전 323년 병사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3만과 기병 5000의 군대로 동방 원정을 출발해 불과 7년 만인 기원전 327년에 인도의 서북부까지 진출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도 역사에서 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미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고 동방의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인도 서북 방면의 탁실라(Taxila)와 제룸(Zerum), 두 나라를 간단히 제압하고 라비 강변에서 10만에 달하는 인도 연합군의 방어망까지 뚫는 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북인도 전역을 노려볼 즈음 오랜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더 이상 진군을 원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변방만 건드려보고 철군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공은 펀자브의 일부에 불과했고 점령 기간도 짧았지만, 인도로서는 처음으로 외부 세계를 접한 것이었으니 영향은 엄청났다. 드디어 인도는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동양과 서양은 비로소 교류를 시작했으며(여기서의 동양이란 아직 중국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고 오리엔트 세계만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로는 육해상의 교통로가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초래한 커다란 문화사적 사건은 간다라 예술이다. 간다라는 펀자브 지역의 한 지방인데,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을 계기로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발달한 조각 기술이 인도 예술에 원용된 것은 이 시기부터다.

 

 

청년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35000명의 병력으로 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는 당면한 숙적 페르시아를 무찔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자신의 정복 전쟁이 장차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지는 알지 못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된 것이다. 불교의 발생과 더불어 불교 예술도 발달했지만, 원래 인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인도의 초기 불교 예술가들은 부처를 인간의 형체가 아니라 발자국이나 빈 의자 따위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마음대로 인간과 똑같이 묘사했다(세속과 거리를 둔 부처와 달리 그리스 신들은 인간처럼 사랑도하고 화도 내고 질투로 속도 끓이는 인격신이었던 탓이 크다).

 

처음 만드는 불상이니 모델이 필요했다. 그리스인들은 불상의 영감도 주었지만 기법도 제공했다. 그리스 조각상이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처음 등장한 불상은, 웅장하고 이상적인 묘사를 중시한 당시 인도의 전통 미술과는 달리 옷 주름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그리스식 조각 기술로 제작되었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인데, 이후 이 양식은 불교와 더불어 동아시아 일대에 전해졌다. 신라 석굴암의 불상이 곱슬머리에다 고대 그리스 신과 같은 의상을 입은 것은 바로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간다라 미술이 더 큰 관심사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시 인도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인해 예술적인 측면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외부의 침략을 받아본 나라는 대개 그렇듯이, 무엇보다 인도인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자각성을 일깨우게 되었다. 이런 원동력은 곧이어 인도에 최초의 통일 국가가 들어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물러가자 옛 마가다의 영토는 난다 가문이 잠시 지배했다. 그러나 이내 마가다의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 재위 기원전 321년경~기원전 298년경)가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빼앗았다. 찬드라굽타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인도 국민의 민족적 자각성이 일어난 데에 힘입은 바도 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철군함으로써 인도 서북부에 힘의 공백이 생긴 탓이 컸다.

 

하지만 탄약이 장전되어 있어도 방아쇠가 없으면 탄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지역의 패자를 노리고 처음부터 상비군을 육성한 찬드라굽타는 20여 년에 걸쳐 60만 명의 대규모 군대로 북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제국을 세웠다. 인도 역사상 최초의 강력한 제국인 마우리아는 얼마 안 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만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인도의 역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확실히 자리 잡게 된다.

 

 

간다라 양식. 지금까지 존재하는 고대의 모든 불상은 간다라 시대 이후의 것들이다. 헬레니즘 시대 이전까지는 불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고행하는 불상과 대비되는 이 잔잔한 모습의 불상은 간다라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옷 주름과 몸의 굴곡은 그리스 신상과 닮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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