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과 존 버닝햄 톺아보기
해석 | 내용의 올바른 해석 |
용납할 수 있는가. 아이가 감히 할머니를 골탕 먹이다니. 윤리 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읽으라고 하라고? 이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쓴 거야?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들쑤신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 가운데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면서도 못되게 물었던 할머니를 혼내주는 조지의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낀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어, 하는 한편으로 그 일이 진짜 일어나는 듯 능청스럽고 자연스럽다.
이 책은 그저 로알드 달(Roald Dahl, 1916~1990)의 재치와 상상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득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간간히 어린아이의 기묘한 상상력이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기발하고 엽기적인 행동이 지루함을 달래준다. 그래서 시종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한달음에 끝까지 읽게 만든다. 이것이 로알드 달의 마법의 약이 아닌가 싶다.
늘 자기를 구박하고 부려먹는 괴팍한 할머니를 골려주려고 ‘어떻게 그런 것까지!’ 할 만한 물건들을 모두 넣어 마법의 약을 만드는 조지를 보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동화적 상상력에 의해 할머니는 죽지 않았다. 진짜로 그건 마법의 약이 되었고 그 약을 먹은 할머니는 마구마구 자라난다. 나중에는 할머니마저도 조지의 마법의 약을 즐기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면 조지의 의도는 오히려 순수하다. 가축을 크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나 커지려는 욕심을 멈추지 못하는 할머니가 화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로알드 달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빌려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불안과 불행은 결국 어른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아이들 눈에 어른들이 얼마나 밉겠는가. 꼭 조지의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어른들이여! 몸에 좋은 약이라도 무턱대고 먹지 마라. 꼭 성분을 확인하기 바란다. 특히 그 약이 어린 아이의 손에 들려 있을 때는 더더군다나.
동화작가 이재복의 말을 빌리면 동화는 ‘계단형 문학’이 아니다. 성인 문학으로 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과 문학적 예술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동화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거나 자기중심적(자기가 아는 만큼 해석함)으로 설명한다.
로알드 달의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와 『아북거 아북거』,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을 예로 말해보겠다. 강의 시간에 의견교환과정을 거쳐 설명하면 좋겠지만 강의 기회가 없는 상황이라 글로 풀어본다.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는 로알드 달 작품 중에서도 엽기적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앞에서 인용한 인터넷 서평의 내용을 봐도 그건 충분히 알 수 있다.
대부분 ‘용납하기 어려운 엽기적인 내용에 당황했으나 로알드 달의 무한한 상상력에 매료됐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책을 읽고 난 후 느낌을 쓴 말, 그대로 독후감으로야 책잡힐 일이 없지만 우리가 하는 작업은 동화를 통한 사고력 신장이기에 한 걸음, 아니 갈 수만 있다면 두 걸음 세 걸음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용을 충분히 속속들이 숙지하고 ‘왜’를 붙인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우리의 당위를 기억해보자. 『동생』에서 많은 질문이 나올 수 있지만, ‘음악이는 왜 잘못했다고 빌지 않았을까?’하는 질문이 가장 핵심적이며, 이 질문을 잡아내지 못하면 작품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감상 차원에서는 ‘가장 핵심적’이란 표현은 불필요하다. 감상은 각자의 마음에 들어 있기에).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에서는 어떤 핵심적인 질문을 끌어내야 할까?
특히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는 더 많은 질문이 가능한 작품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핵심 키워드는 14쪽의 ‘너는 지금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너는 너무 빨리 자라고 있어. 너무 빨리 자라는 아이들은 말이야, 머릿속이 텅텅 비어 있고 게으르단 말이야’, 28쪽의 ‘만약 약이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약이야’, 89쪽의 ‘할머니는 점점 자라면서 키는 커지는 반면 몸집은 홀쭉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154쪽의 ‘휴, 이게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머니가 집안의 골칫거리긴 했죠’를 들 수 있다.
우리는 89쪽에 나오는 (암탉은 자라났는데도 멋지고 포동포동한 몸집 그대로지만) ‘할머니는 점점 자라면서 키는 커지는 반면 몸집은 홀쭉해졌다’에 주목해야 한다. 암탉이나 다른 가축과 달리 왜 할머니는 몸집은 커지지 않고 키만 커졌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충분히 진지해져야 한다(대개 대답을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질문이 핵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대답은 자기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책 내용 어딘가에서 대답의 근거를 잡아와야 한다.
아기들의 성장은 ‘너저분한 짓’이 아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성장하는 존재다. 문제는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성장하느냐다. 할머니는 아기들의 성장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이 성장하지 못한 존재라고 밝힌다(15쪽). 또한 암탉의 성장과 할머니의 성장을 분명히 비교하고 있기도 하다(89쪽). 멋지고 포동포동하게 커진 암탉이 이상적인 성장이라면 홀쭉하고 키만 커지는 할머니의 성장은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것을 암시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무척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포기했어. 게으름이나 반항, 욕심, 심술부리기, 불결함, 멍청함 같은 아기들이나 하는 그런 너저분한 짓들도 그때 다 버렸단 말이야.(15쪽)
길에서 비켜라!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다 치워라! 요 꼬마 녀석들, 모두 물러서지 않으면 밟혀서 죽을 줄 알아라!(108쪽)
넌 그저 조지밖에는 모르는구나! 조지가 먹을 무엇무엇. 조지가 입을 무엇무엇! 이제는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143쪽)
몇 분 전만해도 정말 멋진 거인이었다가 이제는 갑자기 비참한 소인이 되어 버렸는데, 내가 어떤지 알면 네가 뭘 한단 말이냐?(150쪽)
위 인용글에서처럼 키만 엄청 커버린 할머니의 언행을 통해 현대사회(특히 영국)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승자독식, 극단적인 이기심, 경쟁지상주의에 대해 비판적 판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암탉이나 다른 가축과 달리 왜 할머니는 몸집이 커지지 않고 키만 커졌을까?’에 대한 합리적이며 합목적적인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할머니가 마법의 약 4탄을 마시고 점점 작아져 없어지는 것은 인간의 성장 담론을 바로 잡고자하는 작가적 로망이 담겨있다고 본다. 핵심적 질문에 대해 내용에 근거한 합리적 대답을 했다면 또 다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약을 만들고 할머니에게 먹이는 주체가 왜 8살 조지일까? 마법의 약을 만들기 위해 조지가 선택한 재료들은 원칙이 없는 건가? 조지가 선택한 재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공통점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할머니가 사라진 후 엄마는 왜 하느님 뜻으로 돌렸을까? 할머니가 말한 ‘아래로 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수준이나 아이든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로알드 달은 대단한 상상력을 지녔으며 그의 작품을 읽으면 통쾌하다’는 식의 감상은 사고력 발달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만약 아이가 할머니 몸이 홀쭉하게만 자라는 이유를 ‘할머니 체질의 문제’라거나 ‘할머니의 다이어트’라는 식으로 대답했다면, 그러한 대답의 근거를 추궁해야 한다. 아이가 멋대로 상상하여 대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답을 한 아이를 상상력이 훌륭하다고 추켜세우면 안 된다. 한편 ‘너무 빨리 자라서 살찔 틈이 없었다. 그래서 키만 커졌다’고 대답한다면 가축과 형평성을 들어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엄마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발전된 형태다). 아이는 사람과 짐승은 약효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재반론할 수 있다(아이가 재반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다). 인간과 짐승에게 같은 약도 다르게 반응된다는 대답은 다분히 기존의 자기 생각이며 작품과 상관없이 이미 갖추어진 배경지식이다(맞든 틀리든 상관없이). 그래서 엄마는 인간과 짐승이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작품 내용 어디에 근거를 가지고 있냐고 추궁해야 한다. 스스로 근거를 대도록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가 인터넷을 뒤져서 인간과 동물에게 다르게 나타나는 약효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근거로 내민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건가? 그것은 의미가 없다. 작품 내용에서 근거를 찾아야한다고 강조했던 내용을 상기해보면 말이다(경계를 만나야 사고가 작동한다는 말도 상기해보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엄마가 반론과 재반론을 하지 않아도 아이가 사고실험(고민에 고민을 거듭함)을 통해서 반론과 재반론을 이어 나가는 단계다. 그것이 스스로 경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경계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구분선을 말한다. 실체는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구분선을 자신의 사고 안에서 무수히 늘려나가는 작업이 아이의 진정한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아북거 아북거』는 로알드 달 작품 중에 어린이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여러 반응을 보도록 하자.
이 글은 로알드 달의 동화인데 실버 부인을 사랑하는 호피 씨가 거북이 알피를 사랑하는 실버 부인과 행복한 우리가 되기까지의 순수한 마음이 다소 엉뚱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고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람이 동물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아무 조건 없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은 행복의 우선순위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나이와 무관해야 하며 영혼이 맑은 사람은 물질이나 명예, 또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늘, 당당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기쁨을 마련해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게 해준다. 두 남녀의 일상생활이지만 용기를 갖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지만, 정성을 쏟아준다면 어떤 일도 가능할 것이다. (초등학생의 글)
나는 이 글에서 별로 감동적인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내가 호피씨였다면 그런 상상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영 실버부인을 짝사랑하며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호피씨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포기를 하지 않아야 되겠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끝까지 매달려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끈기를 길러야 되겠다.
위 소감을 읽다보면 잘못된 독서교육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이 경우는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와 달리 작품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호피 씨와 실버 부인은 『멍청씨 부부』의 멍청한 주인공 부부와 같은 성향으로 그려진 것이다. 호피 씨의 잔꾀에 넘어간 실버 부인은 조롱거리로 그렸고, 거짓말(심하게 말하면 사기)로 실버 부인의 환심을 사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 호피 씨도 왕비호(왕 비호감)이다.
로알드 달이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추신으로 달아놓았다. 거북이 알피는 한 소녀에게 팔려 갔는데, 그 소녀는 알피를 순리대로 키웠고, 소녀가 결혼해서 두 자녀를 낳아 기를 때까지도 같이 살고 있으며, 마침내 알피는 두 배 크기로 자랐다는 것이다(He made it in the end-알피가 성장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알피는 30살로 추정된다고 하면서. 거북이의 성장은 아주 느린 것이 순리(사람입장에서 그럴 뿐, 거북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에 그만큼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안달하는 실버 부인이 알피에게 매일 신선한 먹이를 주고 등을 쓰다듬으며 예뻐하는 것은 호피 씨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만큼 어리석다는 신랄한 조롱인 것이다.
이런 정확한 작품 해석은 “실버 부인은 왜 알피가 빨리 자라길 바랐을까?”라는 질문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전 우리 알피가 좀 더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요. 매년 봄마다 알피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전 부엌에서 쓰는 저울로 알피의 무게를 달아 보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피를 기른 지난 11년 동안에 몸무게가 겨우 75Kg밖에 늘지 않았어요. 그건 하나도 늘지 않은 거나 다름 없잖아요!”라고 실버 부인이 말했다.
“지금 무게가 얼마나 나가지요?”라고 호피 씨가 실버 부인에게 물었다.
“고작 370g이에요. 자몽 하나 정도라니까요.”라고 실버 부인이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하긴, 거북이라는 동물은 원래 성장 속도가 대단히 느린 편이지요. 하지만 100년도 넘게 살지 않습니까?”라고 호피 씨는 젊잖게 말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우리 알파가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커졌으면 정말 좋겠어요. 너무 작고 앙증맞잖아요.”라고 실버 부인이 말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런대로 괜찮지 않아요. 심각할 정도로 왜소하다는 사실이 이 애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쑥쑥 크고 싶어한다고요.”라고 실버 부인은 큰 소리로 반박했다.
“실버 부인께서는 진심으로 알파가 커졌으면 하고 바라시는군요!”라고 대꾸하던 호피 씨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했다. 그리고 놀라운 생각이 떠올랐다.
실버 부인은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진심이고말고요!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세상에, 사진에서 보니까 다 큰 사람들이 등에 타고 다닐 정도로 큰 대형 거북도 있던데요! 만약 알피가 그 대형 거북들 사진을 봤다면 샘이 나서 온몸이 시퍼래졌을 거예요!”(25~28쪽)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여러분은 분명 우리(자기) 상황에 비추어 한숨을 쉴 것이다. 영국의 교육상황은 우리와 비슷하다. 써머힐의 나라로 알고 있다면 큰 오해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을 이어간다면 『아북거 아북거』는 『조지 마법의 약을 만들다』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로알드 달은 큰 테두리에서 인간의 본질과 그 본질에 다가서는 성장을 작품에 담고 있으며, 작은 틀에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고발하고 있다. 『마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마찬가지다. 제발 호피 씨의 사기에 넘어가지 마시길. 존 버닝햄이야말로 써머힐 출신이다.
국내에서 27만부 이상 팔린 『지각대장 존』을 살펴보자. 동화작가 이재복의 분석 내용을 참고로 하겠다.
A.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존이란 아이가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분명히 하수구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노는 존재이니까 이 하수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로 출발할 때 아이의 마음은 잠시 어두웠다.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학교에 버티고 있는 들으려 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훈화하기를 좋아하는 선생님, 벌주기 좋아하는 선생님을 생각할 때, 아이의 발걸음은 무겁고 표정은 굳었고, 그래서 그 아이의 마음에 비친 하늘도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간을 사는 존재이기에 고통도 깜빡 쉽게 잊는다.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이는 언제 어디서건 놀이감을 찾는다. 이래서 아이는 하수구를 보고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하였다. 그 하수구에서 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반짝이며 온갖 상상을 하였다. 존이 하수구 앞에서 한 상상은 결코 엉뚱한 상상이 아니다. 하수구에서 악어를 상상하는 것, 이건 너무나 아이다운 생각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상상인 것이다.
B.
여러 번의 반성문을 쓰고 난 다음 학교에 가는 날, 이날만은 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반성문을 쓰면서 알게 모르게 존의 가슴에 살아있던 밝은 동심의 빛, 상상력의 빛, 놀이를 향한 열정은 점점 사르러지고 어른들이 원하는 제도의 틀 속에 갇혀 길들어진 것이다.
C.
학교에 가는 동안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이가 교실에 가자 선생님이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다. 아이는 선생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빨리 좀 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 동네 천장에 고릴라 같은 건 살지 않아요. 선생님”하고 딱 잘라 말하였다. 선생님의 고통에 대하여 아이는 어따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노는 존재에서 분노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D.
이 동화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존이 빼앗긴 놀이공간을 다시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원할 것이다. 귀를 빌려주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의 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존 버닝햄은 이 놀이가 허용되지 않는 세계, 우울하고 어두운 현실 세계에 던져진 아이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를 독자들 스스로에게 찾도록 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 B를 살펴보겠다. 세 번의 반성문 작성 이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등굣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이 원하는 제도의 틀 속에 갇혀 길들여진 것’이다. B글에 동의한다.
하지만 A와 C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재복은 『지각대장 존』을 보면서 아이들 세계를 어른의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자신을 반성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른의 입장에서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판타지를 해석한다. 존은 등굣길에 있는 하수구에서 악어를 상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어가 나타난 것이다. 존에게는 실제로! 세 차례에 걸쳐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반성문을 수백 번 쓴 다음엔 더 이상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노는 존재에서 분노하는 존재로 바뀌어’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 존으로 파악하면 잘못된 것이다.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붙들려 천장에 매달린 것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상상이 아니다. 악어, 사자, 큰 파도, 선생님을 붙잡고 천장에 매달린 고릴라 모두 상상이 아닌 실제하는 것이다. 아무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상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존재로 근본이 바뀌었다. 동화의 상징성을 고려할 수 있지만 상상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이며(동화적 상상이 아닌 동화적 실제라고 하면 쉽게 이해될 터다), 분노에 의해 상상이 멈추거나 선생님에게 ‘통쾌하게’ 복수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억압에 의해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정체성 변신을 그린 우울한 이야기이며, 미국산 쇠고기 위험성을 알린 PD수첩과 같은 성격의 다큐 고발물이다.
인식의 두 차이는 매우 근본적인 차이다. 이재복의 해석대로라면 분노만 멈춘다면(선생님을 용서할 수 있다면)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여전히 등굣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아이지만 존 버닝햄이 그려낸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이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재복의 해석은 선생님 캐릭터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캐릭터의 갈등을 그린 것이지만, 존 버닝햄이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 세계를 송두리째 빼앗는 학교교육 또는 어른들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차이란 전자의 경우 사고력 발전을 위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외 없이 아이들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행동을 선생님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생각한다. 아이들 독후감엔 그러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존, 정말 잘했어”하는 아이들의 환호성은 사고력 발전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반성문을 세 번 쓰고 난 후 왜 더 이상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등굣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가 고민의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 초딩은 놀고 싶다(이재복) |
좋은 그림동화를 읽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늘 곁에 두고 읽는 그림동화가 몇 권 있다. 「지각대장 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동화에는 아이들에게 귀를 빌려주지 않고, 아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나무라기만 하는 입이 큰 선생이 나온다. 내가 바로 그런 선생이었다. 아이들 가슴에 펄펄 살아 있는 상상력을 빼앗고, 그 빈자리에 온갖 잡동사니 지식과 정보를 채워 넣지 못해 안달하는 선생이었다. 이래서 나는 이 그림동화를 늘 참회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지각대장 존」은 이렇게 시작한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림책 첫 장을 펼쳤을 때 나는 먼저 글에 눈이 갔다. 이미 글에 갇힌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라면 아마 글보다는 그림에 먼저 눈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건조한 사실을 뒷받쳐 주는 배경그림은 뭔가 심상치 않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작가는 왜 아이가 학교 가는 아침 하늘을 이렇게 우울하게 그렸을까? 하늘 가득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고, 그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흰 구름이 떠 있다. 아직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아이가 학교에 갈 리는 없고. 이 그림 한 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자니 뭔가 우울하고 불길한 일이 아이 앞날에 일어날 것 같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고 아이 앞에는 곧은 길이 아니라 구부러진 길이 쭉 놓여 있다. 이 무덤덤해 보이는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빛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을 아이는 조심조심 매우 긴장해서 걷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장을 펼쳤다. 밝은 화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의외다. 역시 나는 그림은 저 멀리 두고 글로 눈이 내려간다.
“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 판타지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하수구에서 악어가 나오다니.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 장면에서 존은 분명 현실공간에 서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나오는 “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주지 않았습니다.”란 장면에서 존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하수구에서 악어가 튀어나오는 판타지 공간으로 옮겨가 있다.
보통 그림이 없는 글로만 읽는 동화에서는 현실에서 판타지 세계로 넘어갈 때 그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매개수단이 납득할 만하게 그려져 있다. 꿈을 통해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든지, 아니면 양탄자 같은 마술도구를 타고 넘어 들어가든지, 아니면 나무나 구멍 같은 신비한 자연물 속에 빨려 들어가든지 하여 자연스럽게 판타지 세계로 들어갔음을 알린다. 그런데 이 「지각대장 존」에서는 이러한 매개수단에 대한 설명이 없이 갑자기 판타지 공간으로 넘어 들어가 악어가 나온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상상력이 메마른 어른들이 보기에는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존이란 아이가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분명히 하수구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노는 존재이니까 이 하수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로 출발할 때 아이의 마음은 잠시 어두웠다.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든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학교에 버티고 있는 그 들으려 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훈화하기를 좋아하는 선생님, 벌주기 좋아하는 선생님을 생각할 때 아이의 발걸음은 무겁고 표정은 굳고 그래서 그 아이의 마음에 비친 하늘도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간을 사는 존재이기에 고통도 깜빡 쉽게 잊는다.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아이는 언제 어디서건 놀이감을 찾는다. 이래서 아이는 하수구를 보고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하였다. 그 하수구에서 아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반짝이며 온갖 상상을 하였다.
존이 하수구 앞에서 한 상상은 결코 엉뚱한 상상이 아니다. 하수구에서 악어를 상상하는 것, 이건 너무나 아이다운 생각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는 납득할 만한 상상인 것이다.
존은 학교 가는 길에 이 날따라 하수구에 호기심이 생겨 하수구 안을 들여다본다. 어둡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아이는 순간 죽음을 생각한다. 늪을 생각한다. 강을 생각하고 그 강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이의 상상을 타고 튀어나온다. 그래서 존은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면 하는 상상을 하다가 아주 진짜 악어가 나온다는 기분에 젖어 하수구에서 장난(놀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이렇게 현실에 발딛고 서 있는 존재이면서 늘 놀이를 통해 판타지 세계로 여행하는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동화를 이해하려면 판타지세계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으레이 판타지 세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읽히는 어른들(작가들)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였던 사람들이면서도 어릴 때 가졌던 판타지 세계에 대한 감각을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만 갇혀 있는 판타지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각대장 존」에서 존이 만난 악어는 현실을 초월한 판타지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악어이다. 존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존이란 아이의 놀이 속에 등장하는 악어는 모습이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그림 속의 악어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동심은 단순하니까 아이들이 상상하는 놀이 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이렇게 단순하며 해학적인 것이다. 나무들이나 가로등이나 해나 하늘이나 모두 단순하고 그야말로 예술의 옷을 입고 있다.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존은 여전히 악어와 오는 놀이공간 속에 존재한다. 악어가 가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아 존은 장갑 한 짝을 휙 던져 주었다. 악어는 물었던 가방을 놓고 장갑을 물었다. 이 행복한 놀이공간 속에서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고, 누가 더 낮은 자리에 있는지 구별이 없다. 이제 존은 악어와 완전한 친구가 되어 있다. 존은 입고 있던 옷색깔마저 악어와 같아졌다. 마치 레오 리오니의 그림동화 「파랑이와 노랑이」에서 파랑이와 노랑이가 서로 사랑하여 몸을 합치니 녹색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그런데 오른쪽 그림을 보라. 놀이공간 속에서 아이는 그 자신 삶의 주인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깨어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자연의 아이를 억누르지 않고 아이는 어른에게 눌리지 않아 목숨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놀이공간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 공간 속으로 돌아온 아이는 너무나 작아져 있다.
나를 더욱 답답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존이란 아이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건 존이 가는 길이다. 이 아이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아이는 지금 서둘러 곧은길을 가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길인가! 지름길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길이다. 어른들은 한 가지 눈에 보이는 삶의 목표에만 얽매어 있는 존재니까 더 이상 돌아가는 길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름길보다는 오히려 돌아가는 길에 더욱더 관심이 많다.
아이들이 아침에 집을 나와 학교까지 가는 길을 보라. 아이들은 천천히 걷는다. 학교까지 가는 목표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다. 만나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이런저런 구경거리가 생기면 다 참견하며 걷는다. 아이들은 이렇게 목표보다는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 더 관심이 많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요구하는 빠른 지름길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구경거리가 가능한 굽은 길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는 악어와 놀다가 학교에 늦고 말았다. 굽은 길을 걸어가면서 길에서 만나는 자연에게 하나하나 눈인사하며 걷던 아이가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간다. 현실공간으로 돌아온 아이는 지금 직선의 길을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곧은 길, 그 길은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길을 존은 달리고 있다. 허겁지겁 학교에 달려갔으나 존은 늦고야 말았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너 늦었구나. 게다가 장갑 한 짝을 어디다 두고 왔니?”
선생님이 하는 말에 존은 이렇게 당당히 말하였다.
“예. 늦었어요, 선생님. 왜냐면요 학교에 오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나와서 제 책가방을 물었어요. 제가 장갑을 한짝 던져 주니까 그제서야 놓아주었어요. 장갑은 악어가 먹어 버렸어요.”
존은 비록 학교라는 놀이가 끼여들 공간이 없는 기계적인 사고만을 요구하는 공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놀이공간(판타지공간) 속에서 이 냉엄한 현실 공간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래서 존의 가슴에는 아직 따뜻한 상상의 피가 살아 있기에 밝은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이렇게 거침없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존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정답이 있는 교육에만 길들여진 선생님은 존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학사모를 쓰고 손에는 지시봉을 들고 반듯하게 서 있는 선생님의 모습은 방정환의 말을 빌면 ‘냉랭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개벽, 1923.1)의 부정적인 면을 상징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동심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선생님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하였는가. 선생님은 아주 높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동네 하수구에 악어 같은 건 살지 않아. 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300번을 서야 한다. 알겠지?”하고 벌을 주었다. 이래서 존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반성문을 300번이나 써야 했다. 존에게 벌을 준 선생님은 아동문학을 알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적어도 아이가 학교 오는 길에 악어와 놀다 늦었다면, 벌 대신에 대단한 흥미를 갖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교육은 대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아이들과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당연히 아동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다. 보통 아이들은 귀를 통해 먼저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 눈을 통해 읽는다. 이래서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뭐니 뭐니 해도 듣는 귀가 먼저 뚫려야 한다. 어른들 가운데는 아이가 빨리 글을 깨우쳐 혼자서 책을 읽어주길 바라는 이도 있다. 이건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듣는 귀가 꽉 막혀 버리면 읽는 눈도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아직 읽는 눈이 열리지 않은 아이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가 그들의 듣는 귀에 호소하는 문학이다.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동화를 소리내서 읽는다. 옆에 듣는 귀를 크게 열어 놓고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생각하고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듣는 귀가 잘 열려 있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좋아한다. 그런데 간혹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시큰둥하고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듣는 귀를 열어 놓게 하려면 먼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아이들은 잘 듣는 귀를 타고났는데, 이런저런 이로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까 아이들 가슴에도 여러 가지 아픔이 꽉 들어차 그만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듣는 귀를 막아버렸다. 그깟 시시하고 고통만 주는 이야기들, 늘 훈계만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지겨워하고, 아이들은 그들의 고통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너희들의 고통이 뭔지 들어보고 싶으니 가슴 속 이야기를 해 달라고 선생님이 먼저 귀를 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때 아이들도 선생님에게 귀를 빌려줄 것이다. 이래서 들려주는 것보다 들어주는 게 먼저다. 아이들 독서지도는 순서가 있다. 아이들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그런 다음에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그 다음에 한 발 더 나가 읽는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
히틀러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본 회퍼란 목사가 있다. 본 회퍼는 봉사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봉사가 ‘들어주는 봉사’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들어줄 귀를 찾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들어야 하는 것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찾고자 하는 귀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형제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곧 하느님의 말씀에도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도 말을 지껄여대기만 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시작이며, 결국 경건한 말로 나열된 영적인 주절거림과 성직자의 생색내는 태도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참고 들을 수 없는 자는 곧 논지에서 벗어난 말을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과 진실로 대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시간이 너무 귀중하여 결코 침묵으로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국 하느님과 그의 형제들을 위한 시간은 갖지 못하고 오로지 그 자신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위한 시간만을 갖게 될 것이다.”(「본 회퍼의 선택」, 청하, 1986. 114쪽)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은 들어줄 귀를 찾고 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을 하려고만 한다. 본 회퍼의 말을 빌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들어주는 봉사’를 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이다. 먼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들어주는 봉사’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가슴이 열리고 듣는 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사람들만이 들어줄 수 있다. 이래서 듣는 행위에는 남 앞에서 나의 아픔을 뒤로하는 희생의 의미가 들어 있다. 남을 먼저 받드는 섬김의 의미가 들어 있다. 동화는 아이의 자리에서 보면 '듣는 문학'이지만 어른의 자리에서 보면 ‘들려주는 문학’이다. 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 듣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동화를 듣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들어주는 봉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씨앗이 심어질 것이다.
이야기 듣는 시기를 충분히 거치지 않고, 혼자서 읽는 문학 시기로 접어든 아이들은 사람과 멀어져 책 속에 갇혀 버리기 쉽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책 속에 갇혀 버린 아이들 마음속에는 미처 들어주는 봉사를 기꺼이 해낼 수 있는 그런 넉넉한 마음이 형성되기 어렵다. 아이들이 글을 빨리 깨우쳐 혼자 책을 읽을 줄 안다고 좋아할 것만은 아니다. 독서 지도는 읽는 눈보다는 들어주는 귀를 더욱 밝게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온갖 소리를 귀담아 듣는 그런 침착하고 온순한 귀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읽는 문학의 시기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선생님이 동화는 듣는 사람을 위한 문학이란 사실을 알고 판타지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아이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들어주는 봉사’하는 자리에 섰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그래 학교까지 오는데 그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단 말이냐. 그 이야기 좀 더 들려줄래.” 하였을 것이다. 아이의 가슴에 환하고 밝은 놀이공간, 상상의 공간, 판타지의 세계가 학교까지 와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이에게 ‘귀를 빌려줄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우리 학교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호기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은 학교’가 다시 ‘살아 있는 학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들어주는 봉사가 이루어지는 공감으로 학교가 바뀔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존은 다음 날 서둘러 학교에 갔다.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쓰는 고통을 겪었지만 아이는 아직도 동심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그래서 이날 존은 풀숲을 지나다가 사자를 만났다. 풀숲에서 사자 한 마리가 나오더니 바지를 물어뜯었다. 존은 가까스로 나무 위로 기어올라 사자가 지쳐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래서 이날도 존은 허겁지겁 학교로 갔지만 늦고 말았다. 선생님은 늦게 온 존에게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존은 다시 “덤불에서 사자가 튀어나와 바지를 물어뜯는 바람에 늦었다.”고 말하였다. 역시 선생님은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며 이번에는 구석에 돌아서서 400번을 외치라 하였다.
이렇게 심한 벌을 두 번이나 받고 또 존은 다음 날도 서둘러 학교로 간다. 그림동화를 이루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반복효과이다. 되풀이는 대개 세 번을 한다. 두 번이나 너무 싱겁고 어딘지 미련이 남는다. 네 번은 너무 지루하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세 번이 가장 적당하다. 미련이 남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그래서 삼세 번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날도 존은 서둘러 학교에 가면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가다 존은 또 장난기가 발동하여 파도가 밀려오는 상상을 하고, 파도 타는 놀이를 하였다. 이날도 학교에 늦었고, 선생님은 왜 늦었느냐고 물었고, 존은 다시 파도 때문에 늦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며 반성문을 500번이나 쓰라 하였다.
여러 번의 반성문을 쓰고 난 다음 학교에 가는 날, 이날만은 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반성문을 쓰면서 알게 모르게 존의 가슴에 살아 있던 밝은 동심의 빛, 상상력의 빛, 놀이를 향한 열정은 점점 사그러지고 어른들이 원하는 제도의 틀 속에 갇혀 길들여진 것이다. 이날만은 학교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존은 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존은 학교를 향해 곧장 걸어간 것이다. 닫힌 어른들이 요구하는 삶대로 살기 위해 한 눈 팔지 않고 곧장 달려간 것이다. 이제부터 존은 아이다운 아이에서 어른들의 마음에 맞는 애어른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냉랭하게 마르고, 언 지식인으로 점점 변해가게 되었다. 이제 존은 ‘몸으로 사는 존재’에서 ‘관념으로 사는 존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이는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전히 꿈을 꾸는데 몸으로 살아가는 아이가 꾸는 꿈과 관념으로 살아가는 아이가 꾸는 꿈은 분명 다르다. 관념으로 살아가는 아이의 꿈속에 나타나는 판타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풍부한 놀이는 존재하지 않고 자신을 억압하는 선생에 대한 분노, 증오가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되어 나타난다.
학교에 가는 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이가 교실에 가자 선생님이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다. 아이는 선생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빨리 좀 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 동네 천장에 고릴라 같은 건 살지 않아요, 선생님.”하고 딱 잘라 말하였다.
선생님의 고통에 대하여 아이는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노는 존재에서 분노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도 존과 같은 아이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놀이를 통해 현실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아이들이 놀이공간을 빼앗길 때 분노하고 절망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놀이공간에서 꿈꾸는 존재로 남아 있지 못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 외로운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다음 날도 학교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지각대장 존」은 이렇게 아이가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끝이 나고 있다. 그러나 동화는 끝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이 동화에 등장하는 존의 삶은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이 동화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존이 빼앗긴 놀이공간을 다시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 원할 것이다. 귀를 빌려주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선생의 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존 버닝햄은 이 놀이가 허용되지 않는 세계, 우울하고 어두운 현실 세계에 던져진 아이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를 독자들 스스로에게 찾도록 하고 있다.
아동문학은 어두운 시대에 던져진 동심이 삶의 문제로 어떻게 고통받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요즘 어린이문학을 하는 동네에서는 누구나 좋은 창작품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란다. 예전보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상대적으로 감동이 있는 작품집은 적다. 왜 그럴까? 그건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동심관, 자연관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각대장 존」에 등장하는 존과 같은 아이가 겪고 있는 아픔은 지금 우리 나라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버닝햄은 「지각대장 존」을 통해서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숙제를 남겨 주었다. 버닝햄은 이 외롭고 쓸쓸한 아이,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를 향해 서둘러 떠나는 아이가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달라고 화두를 던져 놓았다.
존이라는 아이는 어느 시대든지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그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두운 시대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이 진정 구원에 이르는 동심의 발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
존 버닝햄 / 앤서니 브라운 /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 레오 리오니와 박동섭과 황경민 /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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