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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10 -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본문

학교/연수

16.11.10 -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건방진방랑자 2024. 9. 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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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박준규(지지학교 교장)

 

 

   

마틴 부버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유대인으로, 187828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태어났다. 부버는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격변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그의 독특한 사상과 철학을 형성하였다.

 

현대에 있어서 히브리 사상가로서의 마틴 부버의 이름은 유럽과 미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서구사상계에 끼친 그의 사상적 영향과 철학은 눈부신 것이며, 신학과 현대철학을 위시하여 미학, 사회학, 교육학 그리고 정신의학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부버는 현대사회의 정신문화적인 면을 강조하는 종교사상가로 평가되며 그의 영향을 심리학에서부터 문학비평까지, 정치과학에서부터 교육에까지 다양한 범위에 이르고 있으며, 그 영향의 힘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버의 사상적 가치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경쟁과 수단적 가치 추구의 상대적 인간관계로만 이해하는 세태에 부버의 나와 너라는 인격주의 철학은 민중을 이끄는 하나의 길잡이처럼 되었다. 나와 너의 인격적 교류라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가야 할 복음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마틴 부버의 사상을 다루되, 그 중 만남과 대화에 관한 사상의 교육적 역할에 대해 다루기로 하겠다.

 

 

 

 

 

   

-의 관계

 

부버는 나와 너에서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고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화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전존재, 달리 말하면 전인격의 만남으로서 가능하다. 이를 대화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부버의 사상에 있어서 부분적인 사상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하는 핵심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버가 말하는 대화와 만남의 의미와 관계는 -의 관계와 -그것의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는 존재하는 와 존재하는 와의 만남이며 존재하는 상대방에 대해 주관된 관심을 지니게 되며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외적인 면에 관심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는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있는 존재다. 뿐만 아니라 와 관계하고 있는 타자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본질을 인정한다.

 

부버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관계는 -의 관계를 말한다. ‘-의 관계는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에게 몰입되어 타자를 이해하는 관계를 말한다. ‘-의 관계는 단지 인간과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역시 가 될 수 있다. 부버는 -관계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인 인간과 영원한 너와의 관계를 포함한다. 또한 살아있는 생물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조차도 그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아서 부버의 사상은 모든 닫혀있고 단절되어 있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관계들을 화해할 수 있게 하고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관계

 

부버가 말하는 또 하나의 관계 양상은 -그것이다. 이것은 -의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관계와는 상반되는 특성을 갖는데, 인간 혹은 관계맺음의 대상을 전체와 목적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체와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부버는 -그것를 개체라고 하고 자기 자신을 경험과 이용의 주체로 인식한다. 개체는 현실성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다만 홀로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개체는 다른 개체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킨다. -그것는 타자와의 자연적인 분리로부터 나타나게 된다.

 

개체가 스스로 분리하려는 목적(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것)은 경험하고 이용하기 위함이며, 경험하고 이용하는 목적은 단지 자기 자신만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개체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 되며 타자를 한 대상으로만 여기게 되고 개체 자신 이외의 모든 것과 분리된 상태에서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이용할 뿐이다.

 

부버의 세계에 대한 관계는 전체와 목적으로서의 -관계인 인격적 관계, 대화적 관계와 -그것관계인 개체와 수단으로써의 개체적인 관계로 설명되어진다. ‘-관계에서는 내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목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그 어떤 다른 수단적이고 기능적인 것이 침투하지 못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 반면, ‘-그것관계인 개체적 관계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그 외형적인 환경이나 조건들에 의해 지배당하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라기보다는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대화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개체적, 수단적 관계가 만연되어 대화가 단절된 현대의 상황에서는 -관계인 인격적 관계, 대화적 관계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플루서와 커뮤니케이션 공동체

 

우리가 플루서의 구상들을 순전히 기술적 유토피아로 오해하지 않으려면, 플루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두 가지 중요한 사항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첫째, 그는 커뮤니케이션 개념이 언어를 걸친 의식내용들의 단순한 교환과 동일시되고 있는데 대해 반대하면서 창조적이고 정신적으로 생산적인 것의 차원으로써 특징 지워지는 대화로서의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대화란 불확실하고 미심쩍은 개별정보들을 지닌 사람들이 이 개별정보들을 통해 어떤 새로운정보를 얻고자 하는 과정이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들이 서로 관련되고 관념들이 문자적으로 서로 교차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정말로 창조적인 장소는 대화들이 네트워크, 즉 케이블들의 아고라이지 결코 고립된 개별의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화와 네트워크화에 대한 플루서의 이념들은 따라서 둘째로 인간주체(주관성)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인간학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즉 개인이라는 낡은 관념틀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플루서의 철학은 근세의 주체에 대한 다양한 해체들-니체와 하이데거, 특히 프랑스의 탈구조주의-로 수렴되고 있는 듯하다. 플루서의 철학은 정보사회와 그것의 미디어들이라는 테마로 구체화되어 포스트모던의 특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철학에 의해 오랫동안 사수되어 온-그러나 잘못된- 인간관과 결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어떤 딱딱한핵심(가령 주관이나 영혼)은 스스로가 논리적 그리고 실존적인 비사물(Unding)임을 드러내고 있다.” 자아는 커뮤니케이션의 실타래들이 얽히고 설켜 망을 이루는 바로 그곳에서 형성되고 부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플루서의 주체이해는 주체를 해체하려고 했던 포스트모던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가 텔레마틱적인 미디어 사회의 인간학을 위해 주체(Subjekt)’를 대신해서 새로 제시하는 개념은 프로젝트(Projekt)’이다.

 

후자는 주어진 대상세계에 마주해 있는 주체도 아니고 작업도구를 사용하는 자도 아니며, 텔레마틱의 미디어 복합체 속에 존재하는 회로판의 한 요소로서 인간이란 더 이상 데이터들의 주인이 아니라 그 자체 데이터들의 피드백 과정에 이식되어져 있는 하나의 회로판과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개별 의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싹트고 있고 자아와 타아의 형상들은 대화 속에서 그 근원을 지니고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먼저 그 속에서 형태가 갖춰진다는 이념들은 유대적 대화철학의 근본사상이며, 그것은 특히 마틴 부버에 의해서 발전된 바 있다. 이점에서 플루서의 개념들은 부버에 직접 연결되고 있으며, 텔레마틱 사회에 관한 플루서의 구상도 아마도 정보화시대라는 조건 하에서 유대의 대화철학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부버의 패러다임이 만남이었다면, 플루서의 패러다임은 이와는 달리 네트워크화라고 할 수 있다. 부버가 대화적인 것을 육체-영혼의 어떤 직접성과 관계지었다면, 플루서는 그 관계들을 다채롭게 하고 가상화시키는 기술을 매개로 한 하나의 새로운 더 발전된 직접성을 기획했다. “텔레(Tele)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 있는 사건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인간도 포함된다. 우리는 텔레마틱 덕분에 상당히 많은 숫자의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 속에서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고, 그들도 우리 속에서 그들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한때 멀리 있던 것과 지금 가까이 가져온 것 사이에서 하나의 대화적 관계가 생성되고 있다.”

 

유대적 대화철학과 플루서의 접속은 사고에서의 윤리적 특징과 결부되고 있다. 타자-자연 또는 주변인-와 일차적 관계는 주체가 객체를 인정하고 지배하기를 원하는 근세적 의미에서의 주체-객체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적 인정과 존중의 태도이며, 이것이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의 지구적 확대는 불가능할 것이다. 기술적 가능성들에 주목하여 플루서는 자유와 책임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기획하고 있다. 텔레마틱은 인간을 낡은 속박들로부터 이끌어내고 인습적으로 부과된 관계들을 의식적이고 자유롭게 선택된 관계들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그리고 책임은 텔레마틱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데, 인간은 텔레마틱의 덕분으로 이전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멀리서 사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추상적 요구를 강요하는 전통적 휴머니즘의 의미에서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비물질적 케이블의 도움으로어떤 구체적인 선택을 가능케 하는 관계이다. “휴머니즘은 사멸할 것이다. 그리고 휴머니즘을 대신해서 과거에는 멀리 있었던 다른 사람들과의 책임 있는 연대의식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으로부터 이웃사랑으로의 놀라운 복귀이다. 물론 그것은 유대교와 크리스트교가 의미하는 그런 이웃-바로 옆에 있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내 곁에서 가까이 오는 먼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으로서의 사랑이다.”

-빌렘 플루서와 텔레마틱 사회의 유토피아, 윤종석

 

 

 

 

 

 

아래는 오마이뉴스의 20131226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책 안 읽어서 사랑스럽다?라는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 번 읽어보기로 하자.

 

미디어는 좁은 의미로 TV, 방송, 라디오, 잡지 등의 매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캐나다의 문명 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넓은 의미의 미디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도구라고 정의했다.

 

동물은 땅을 팔 때 제 발로 파지만 인간은 도구를 이용한다. 맥루한의 말대로라면 이 도구 또한 미디어다. 도구가 인간과 세계 사이의 매개체인 것처럼 미디어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다.

 

이런 의미에서 체코 태생의 커뮤니케이션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최초의 미디어는 이미지라고 말했다.

 

그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디어의 변화를 설명하며 각 시대의 인간관을 분석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지난 11,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빌렘 플루서가 제시한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미디어의 변화와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를 주제로 강의했다.

 

 

 

   

최초의 미디어는 이미지</h2?

 

그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를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f)’ 같은 구석기 시대 여인상, 주로 짐승들이 그려진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벽화 그리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문자문화 이전에는 인간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이미지에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비너스는 해부학적으로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됐습니다. 출산, 육아, 생산을 위한 것입니다. 이걸 만듦으로써 애를 잘 낳고, 잘 기를 것이라는 바람이 반영됐습니다. 가상의 원인이 현실을 만든다는 사유방식, 원시시대의 상징형식을 주술적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주술은 소용이 없지만 효용은 있습니다.

 

어떤 주술은 나름대로 의미가 존재합니다. 금줄이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금줄은 타인의 접근을 막아 감염 위험을 줄이고 태아를 보호하는 경험이 쌓인 지식입니다. 바이러스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는 그런 형식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주술들은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술적 형식에 담아 그것을 저장하고 전달했다. 하지만 대부분 주술은 사용가치가 전혀 없다. 이에 대해 진교수는 다만 주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폭력 앞에서 공포감에 질려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복된 시행에도 불구하고 주술이 소용이 없다는 걸 언젠가는 깨닫습니다. 인간과 세계가 다시 끊어집니다.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는 분별력을 갖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이미지가 가진 주술성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이미지가 예술이 되면서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낯설어집니다. 그때 등장하는 두 번째 매개체가 텍스트입니다.”

 

 

 

   

의식을 재구조한 문자의 등장

 

문자를 이용해 인간은 세계를 기록하게 됐다. 진 교수는 새로운 이미지의 등장은 과거의 생각이 매체만 바꿔서 나타난 것을 뜻하지 않는다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한다고 말했다. 문자의 등장은 다른 사고방식의 등장을 의미한다. 자연을 관찰해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법칙으로 확정하면서 자연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텍스트 문화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집니다. ‘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는 알파벳이고 하나는 넘버입니다. 알파뉴메릭코드(alphanumeric code)라고 하는데 문자와 숫자 코드 두 가지 이질적인 결합으로 이뤄졌습니다.”

 

한동안 철학자가 세계에 대해 설명하거나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최초에는 과학이 없었고 모든 학문을 철학이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자연과 사회의 거의 모든 현상에 대해 문자로 글을 썼다. 17세기경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권리가 인문학자에서 자연과 학자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진 교수는 칸트 같은 철학자가 태양계 행성에 관한 가설을 발표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철학자가 천문학 가설을 발표하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다이는 권력이 넘어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자연의 수학화는 왜 중요할까? 사실상 인간이 알파벳으로 자연을 기록하는 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기술적 관점이 극히 제한된다. 말로 건물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이 인간을 정복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연을 수로 번역하는 것이다. 자연을 수학화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자연의 연속량을 12345처럼 딱딱 끊어진 수로 어떻게 바꾸나 하는 것이다. 연속적인 자연(continuity)과 불연속적인 수(discontinuity)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17세기에 발명됩니다. 그 방법이 라이프니츠와 뉴튼이 발견한 미적분입니다. 영국과 독일의 전혀 다른 지역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미적분이 발명됐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연 정복의 이론적 가능성이지 아직은 실천적 가능성이 압니다. 왜냐하면 실제 사용되는 수학적 문제들은 복잡합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미사일의 궤적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실질적 자연 정복의 이론적 가능성은 17세기에 마련됐습니다. 그러나 자연정복의 이론적 가능성이 실천적 가능성으로 전환되려면 계산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계산기 시대가 등장합니다. 오늘날 기술은 과거 기술과 차원이 다릅니다.”

 

 

 

   

문자는 세계를 담는 모형

 

세계와 인간의 관계가 다시 끊어진다. 이제 사람들이 텍스트를 믿지 않는다. 진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람이 상당히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이라서 팩트보다는 해석을 강조한다팩트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팩트(fact)’의 어원은 라틴어 팍툼(factum)’에서 왔다. ‘팍툼만들어진 것(the made)’이라는 과거분사 형태다. 팩트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들뢰즈, 데리다, 보드리야드, 푸코는 근대인식론적 낙관주의가 없고 회의적이다.

 

옛날에는 책이 세계와 인간을 매개했습니다. 세계를 알고 싶으면 책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읽어도 세계를 모릅니다. 책을 읽고 아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해석을 아는 것입니다. 옛날엔 현대인의 심리를 알고 싶으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라고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의 심리가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연과학이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는다. 인문과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라고 보고 자연과학은 세계 그 자체라고 보지만 결국 그렇지 않다. 진 교수는 이에 대해 자연과학에 대한 근대 인식이 무너진 것은 불확정성 원리때문이다이라고 말했다.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산능력이 부족해 그렇게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가 있고 컴퓨터에 우주 모든 존재의 위치 값, 운동량만을 입력하면 세계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운동량을 측정하면 위치를 모르게 되고 측정하면서 상태가 바뀝니다. 인식론적 낙관주의가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과학자가 주는 세계의 모습을 세계의 모상(세계를 그대로 찍은)’이라 하는데, 실제로 자연과학자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세계의 모상이 아니라 해석된 모습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상은 모상이 아니라 모형이다. 지금은 우리가 가진 기술과 관측 범위 내에서는 모형이 사용되지만 발전하면 폐기될 수 있다. 이 모형을 안다고 해서 세계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형은 굉장히 실제적인(practical)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가정하고 아직까지 쓰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과학도 그렇고 인문과학도 그렇고 텍스트가 곧 세계다라는 생각을 접어버리면서 세계와 인간은 다시 낯설어 진다.

 

 

 

   

텍스트의 죽음과 이미지의 재등장

 

오늘날 사람들은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활자를 소비하지 않는다. 책이나 신문을 읽는 일보다 텔레비전, 컴퓨터를 통해 이미지를 보는 데 더 열중한다. 이와 같은 활자매체의 죽음을 맨 처음 예견한 사람이 맥루한이다. 그는 1964년에 쓴 미디어의 미래에서 활자시대의 종말과 전자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디지털 시대를 연 컴퓨터도 개발 초기에는 텍스트의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컴퓨터 이용 방법이 변한 게 좋은 예다. 빌 게이츠가 윈도우즈를 개발하기 전에는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수많은 명령어를 일일이 기억해야 했다. ‘도스라는 컴퓨터 운영 체제가 문자를 매개로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당시 컴퓨터는 문자문화 도구였다. 그러나 운영 체제가 윈도우즈로 바뀌고 난 뒤 우리는 그림으로 된 명령어(아이콘)을 마우스로 누르기만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 PC통신을 할 때는 아주 긴 글을 자세히도 썼습니다. 그러면 댓글도 성심성의껏 달았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죠? 동호회 게시판에 긴 글을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 스크롤 압박’, 둘째 누가 세 줄로 요약해 주세요’, 셋째 참 좋은 글입니다.’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는 의사소통의 형식이 이미지 중심으로 변했고 글은 부차적 요소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신문은 텍스트문화의 총화입니다. 요즘 신문업계가 힘들다고 하는데 이는 (활자시대가 끝났다는 점에서) 당연합니다. 신문회사들이 종합편성채널에 진출하는 것은 이미지 중심의 문화에 적응하려는 시도입니다.”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그리고 현재의 디지털 시대까지 미디어는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다시 이미지로 변해왔다.

 

 

   

인간이 세계를 창조하는 시대로

 

근대철학에서는 세계를 객체(object),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을 주체(subject)라고 불렀다. , 모든 근대철학의 패러다임은 주객관계가 기본 틀이었던 셈이다. 인간 개인의 주관을 강조하는 주관주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객관주의, 그리고 실재론이나 관념론 모두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그 관계를 설명한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손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세계가 객체(객관적인 대상)였죠. 세계는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다툼(Datum, 라틴어로 주다라는 뜻)’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었으니까요. 동시에 객체를 인식하는 인간은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적어도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인간은 자연환경을 급격히 변화시킵니다. 예를 들면 4대강 사업도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는 일이죠. 이제 인간은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Factum(라틴어로 만들다)’으로 바뀌었습니다.”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는 더 이상 인간과 세계의 주객관계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세계는 인공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 이상 세계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변형시킵니다. 여기서 세계가 객체라는 의미는 사라집니다. 객체의 개념이 없어지면 동시에 객체를 인식하는 주체도 의미를 잃게 됩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주객관계로 바라보던 패러다임이 무너지게 되는 거죠.”

 

 

포스트-히스토리 이전에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세계를 바꾸는 방식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지털시대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1996년 영국에서 양을 복제한 뒤 현재는 토감(토마토와 감자의 합성식물), 무추(무와 배추의 합성식물) 등 지금까지 없던 합성생물을 만들게 됐다.

 

인간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DNA를 창조해낸다. 디지털시대 인간은 생명창조의 근처에까지 와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은 주체가 아니다. 자기 상상을 앞으로(pro) 던져(ject) 실현해나가는 존재, 즉 기획자(projector). 근대시대에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게 중요했다면 디지털시대에는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텍스트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지를 매개로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했습니다. 이때 인간은 주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죠. 문자가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문자를 매개로 한 기술적 이성을 중시하게 됩니다. 문자문화의 도래죠. 그런데 디지털시대에 더 이상 텍스트는 세계를 설명할 수 없게 되고 인간은 다시 이미지를 미디어로 택하게 됩니다. 문자문화가 퇴조하면서 기술적 이성은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미지를 매개로 한 상상력이 기술적 이성을 만나게 된 이 시대는 기술적 상상력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술적 상상력과 달리 상상 속 세계를 현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진 교수는 소니가 개발한 워크맨을 기술적 상상력의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어디서나 원하는 음악을 듣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음반시장의 주류는 LP레코드로, LP판을 재생할 수 있는 턴테이블은 워낙 커 휴대할 수 없었다.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1979년 소니가 워크맨을 출시한 첫 달 워크맨은 3천대 정도의 부진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런데 점점 워크맨을 휴대하며 길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기술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사람들은 이에 적응해 그 세계를 살아가는 셈이다. 요즘 우리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상상력은 그만큼 큰 영향력을 갖는다.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것은 기술력보다 그 기술을 꿈꾸는 상상력이다.

 

 

 

   

기술 경쟁에서 상상력 경쟁으로

 

몇 해 전부터 중국의 과학기술이 한국 산업계를 턱밑까지 따라잡았다는 얘기가 자주 들린다. 삼성전자가 6개월만 가만히 있으면 중국 회사가 똑같은 제품을 반값에 출시할 수 있다고 삼성전자의 분발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는 디지털시대의 경쟁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디지털시대의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경쟁은 상상력 경쟁입니다. 중국과 한국의 기술 격차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삼성은 계속 기술력을 높이지만 그렇다고 경쟁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경쟁 없는 블루오션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애플 경우가 그렇습니다. 애플은 디자인을 꾸미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애플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예술가로 불리지만 삼성 이건희 회장은 사업가일 뿐입니다

 

 

진 교수의 말처럼 잡스는 IT 업계의 창조주라 불린다. 반면 삼성전자는 ‘Copycat(모방꾼)’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둘 차이는 기술적 상상력의 존재 여부였다. 그렇다면 기술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디지털 이미지는 문자문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소프트웨어가 프로그램밍돼 있는 것처럼요. 프로그램은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이미지는 문자로 꽤 있는 텍스트를 읽어내야 합니다. 누군가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책을 안 읽어서 사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자문화시대가 지났다는 것을 함의하는 말인데 이는 틀린 말이죠. 텍스트를 무시하고 이미지에만 몰두한다면 포스트-히스토리의 인간이 아니라 프리히스토리의 인간이 됩니다. 기획에서 중요한 것이 한 마디로 문자를 가지고 이미지를 그리는 능력입니다.”

 

 

 

 

인용

지도 / 사진

존 버닝햄 / 앤서니 브라운 / 마틴 부버와 마샬 맥루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 레오 리오니와 박동섭과 황경민 /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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