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櫛文)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기 때문에 승문(繩文)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이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생략한 신석기시대를 일본의 역사에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은 문명의 발상(황허 문명)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라는 발달한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에는 예전과 다른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다가 기원전 3세기경 외부에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토착 문화와 합쳐지게 된다. 이 외부 문화가 유입된 지역에서 생산된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곳이 야요이(彌生)이기 때문에 그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부른다.
인도를 침략한 아리아인은 일방적으로 원주민을 정복했지만, 야요이 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인종은 조몬 원주민들과 어울려 일본 문화의 뿌리를 이루었다(섬이라는 지형적 여건으로 외부인이 아리아인처럼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인종과 언어는 조몬과 야요이가 만나면서 형성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수입되기 전에 조몬인들은 아직 본격적인 농경생활을 하지 못하고 채집과 고기잡이에 의존해 생활했다. 게다가 문명이 발생한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이 청동기를 사용하던 시대(기원전 10세기 이후)에도 일본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석기 문명의 수준에 머물렀다. 농경 생활과 청동기, 나아가 철기까지 가져다준 것은 바로 야요이인이었다(그 덕분에 이후 한동안 일본에서는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사용되는 특이한 문화가 발달한다).
▲ 흙으로 만든 장신구. 조몬 시대 말기인 기원 전 500년 무렵의 귀고리다. 이처럼 작은 물건들까지도 흙으로 정교하게 가공한 것을 보면 대륙 문화와 교류 없이 자생적으로 발달한 조몬 문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조몬인들에게 생활의 안정과 함께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일본의 지도를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대륙과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지금의 기타큐슈(北九州)에 처음으로 정착했다. 그곳에 쉽게 갈 수 있는 외부인이라면 한반도인밖에 없다. 야요이인은 바로 변한(지금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 걸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한반도인이었다.
야요이 문화의 수입과 더불어 일본은 급속히 씨족국가 사회로 접어든다. 일본 열도에서는 거의 1만 년에 달하는 조몬 시대에 있었던 변화보다 불과 수백 년의 야요이 시대에 이루어진 변화가 훨씬 컸다. 하나의 증거로, 중국의 전한(前漢) 시대 역사서인 『한서(漢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100여국을 이루고 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해도 100여 개 나라를 셀 수 있을 정도라면 문명이 상당히 밝았다는 이야기다. 미개에서 문명으로 접어들자마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눈부신 발달을 이룬 것이다.
바다 건너온 문명. 일본 문명은 토착 문화와 한반도에서 유입된 야요이 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된다. 최초의 고대국가 형태인 야마토 정권이 씨족들 간의 격렬한 전쟁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후 일본사를 특징짓는 ‘내전의 역사’를 예고한다. 또한 야마토 정권의 세력권이 문화의 유입지인 한반도 쪽에 편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토착 문화의 수준도 만만찮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빛은 서방에서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가장 큰 섬인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클 정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구 밀도는 적지 않았다. 이 인구가 씨족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도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이 문헌은 한반도의 상고사에 관해서도 귀중한 정보를 주는 역사서다)에 이 국가가 등장한다. 바로 일본 최초의 국가 형태라 할 수 있는 야마토(邪馬臺) 정권이다.
야마토 정권은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힘을 합쳐 28개 씨족사회를 복속시켜 이루어진 나라였다. 왕은 있었지만 아직 왕위 세습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아니었고 부족장들이 협의해 추대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야마토의 왕은 정치적ㆍ군사적 실력보다도 종교적 권위가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보면 왕은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족 사회 특유의 모계적 전통도 강했으므로 여왕이 즉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 천황가의 신적 조상으로 지금도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의 주요 신으로 섬겨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도 태양의 ‘여신’이다.
야마토 정권은 그 기원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일본인들은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에서 고대의 외부인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다】이 계기가 되었지만, 발달하는 과정에도 외부 문화의 도움이 컸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명이 동쪽(그리스와 오리엔트)에서 왔다는 뜻으로 ‘빛은 동방에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에는 ‘빛은 서방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 외부 문화는 중국의 것이었으나 그것을 전달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 서쪽의 한반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변한인들이 최초의 도래인이었다면, 야마토 시대에 그 역할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찌감치 고대국가를 확립하고 있던 백제인들이 담당했다. 4세기 중반과 후반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논어(論語)』와 『천자문』을 전한 것을 비롯해 백제인들은 한자와 한문, 각종 과학과 기술 등 선진 문화를 일본에 보급했다.
5세기 후반에는 백제의 귀족과 유력가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는데, 이것은 백제의 국내 사정에 기인한다.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공으로 개로왕(蓋鹵王)이 죽고 수도가 함락되는 비극을 당한다. 이로 인해 백제는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권력자들 사이에 내분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사실상 백제가 망했다가 재건국한 것으로 본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했다. 백제의 실력자들까지 일본행을 택할 정도로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다【고대 일본 천황의 가계에 백제 혈통이 있다는 설은 그 점을 말해준다. 어쨌든 한반도 고대 삼국 가운데 백제가 일본과 관계를 맺고 왕래를 가졌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역사서 『니혼쇼기(日本書紀)』에도 한반도 삼국 가운데 유독 백제에 관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또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60년 백제가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멸망당할 때 일본이 군함 400척을 보내 백제를 지원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한반도의 선진 문화는 규슈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까지 널리 퍼져 5세기경에는 야마토 정권의 세력이 간토(關東) 지방(지금의 도쿄 일대)까지 파급되었다(대개 문명은 그 빛이 처음 전해진 곳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마련인데, 규슈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자체 문명의 토양도 어느 정도 형성 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야마토의 왕권은 크게 강화되기 시작했고 왕위 세습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의 왕들은 초기 야마토 정권의 왕처럼 종교적 권위만 가진 게 아니라 정치ㆍ군사ㆍ제사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권력자였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를 통해 계속 선진 문물을 전해 받으면서도 한반도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대등한 관계를 자처했으며, 때로는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는 뭔가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주로 중국의 인정과 승인을 받음으로써 주변 부족들에 세력을 과시하고 아직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야마토 정권 후기의 왕들(이들은 ‘오키미’로 자처했는데, ‘대왕’이라는 뜻이다)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 천황의 기원이 된다. 일본 전 역사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경받는 영웅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가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 중국의 왜인. 6세기 중국 남조의 한 나라였던 양(梁)의 문헌에 기록된 왜국 사절의 모습이다. 야마토 정권 시절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호가 없었으므로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일본을 왜국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백제의 사절과 함께 중국에 조공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야마토 정권은 부족 연맹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식 고대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후기에 들어 왕권은 상당히 강화되었으나 아직 다른 부족장들을 경제적ㆍ군사적으로 굴복시킬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왕위 세습 역시 왕이 직접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왕가의 가계만 고정되어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왕족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의 발언권이 강했다. 당연히 세력이 큰 씨족들 간에 다툼이 없을 수 없었다.
대규모 씨족 집단들은 군사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력 다툼이 대단히 치열하고 살벌했다(『니혼쇼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 싼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6세기 중엽 불교를 공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한 끝에 불교 공인에 찬성한 소가(蘇我)씨의 세력이 오토모(大伴), 모노베(物部) 등 권력가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권력을 잡은 소가 우마코(蘇我馬子, ?~626)는 자기 집안의 어린 딸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정했는데, 그 섭정이 바로 쇼토쿠 태자다.
쇼토쿠 태자는 왕을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건국자는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야 하므로 할 일이 많게 마련이다. 쇼토쿠는 행정 구조를 쇄신해 관료 기구를 창설하고, 17조의 헌법을 제정하고, 『덴노기(天皇記)』와 『고쿠기(國記)』 등 일본 최초의 역사서들을 편찬하며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당시 신흥 종교였던 불교를 열심히 보급했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인 씨족의 구분을 극복하고 귀족 세력의 사상적 통일을 꾀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컸다.
이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과 국교를 맺으려 했다. 이전까지는 왕권의 강화라는 소극적인 목적에서였다면, 이제부터는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수평적으로 교류하려는 것이었다. ‘천황’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인데, 이것 역시 중국의 천자와 대등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쇼토쿠는 607년에 중국의 통일 제국 수에 보내는 국서에서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 이듬해에는 “동천황(東天皇)이 서천황(西天皇)에게 아룁니다.”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낸다. 물론 수의 황제인 문제는 태자의 의도처럼 일본을 대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고 조공국으로만 보았지만, 그래도 당시 일본의 자주적 의식은 이후 일본이 중화 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 일본의 토대를 닦은 인물. 일본 고대사의 영웅 쇼토쿠 태자의 화상이다. 양 옆에 두 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당시의 실력 가문인 소가씨와 공동 정권을 구성해 일본 고대국가의 주춧돌을 놓았다.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씨의 수장으로 군림한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 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자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이 마침내 곪아터진 결과이기도 했다. 소가 우마코의 뒤를 이은 소가 에미시(蘇我蝦夷, ?~645)와 그의 아들 이루카(入鹿, ?~645)는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여우의 노릇을 너무 심하게 했다. 그들은 과거 귀족들의 횡포를 답습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스스로 천황을 자처할 정도로 만용을 부렸다.
모처럼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국가 체제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몇 마리 때문에 위협을 받을 즈음, 소가씨의 전횡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한데 뭉치지 않으면 함께 몰락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나카노 오에(中大兄, 625~672) 태자와 나카토미 가마코(中臣鎌子, 614~669)를 중심으로 뭉쳤다. 이렇게 해서 개혁의 주체가 형성되었는데, 때마침 개혁의 모델도 있었다. 7세기 초ㆍ중반은 동아시아 전역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 휩싸여 있던 시기다. 중국에서는 오랜 분열기가 끝나고 대륙 통일이 이루어진 뒤 신흥국 당(唐)이 안정된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역시 중국의 지원을 업은 신라가 세력을 떨치며 삼국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에서 일본의 개혁 세력은 율령을 갖추고 법과 관료제에 의한 정치를 다져나가는 당이야말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여겼다.
645년에 그들은 대담한 쿠데타를 거행했다. 조정에서 외국의 국서를 읽는 자리를 틈타 천황 앞에서 이루카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로 실각한 에미시는 자기 집을 불태우고 자결했다. 소가씨의 우두머리가 죽은 다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가로막을 게 없었다. 그들은 다른 황족과 귀족 들이 지지하는 가운데 소가씨의 잔당을 토벌하고, 소가씨가 세운 고교쿠(皇極, 594~661) 천황을 폐위시킨 뒤 그의 동생 고토쿠(孝德, 596~654)를 천황으로 옹립했다. 나카노오에는 다시 그의 태자가 되고 가마코는 행정 수반을 맡아 두 사람이 전권을 장악했다. 한 세대 전의 지배자였던 쇼토쿠 - 소가 우마코 페어의 완벽한 재현이다.
그 쿠데타를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라고 부른다. 집권 직후 중국의 연호 제도를 본받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다이카라는 연호를 정했기 때문이다. 연호와 더불어 온갖 개혁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모델은 물론 중국이었다. 개혁 세력은 먼저 황족과 귀족, 호족 들의 모든 토지와 농민【당시 농민은 부민(部民)이라고 불렸는데, 토지와 함께 귀족들의 소유물처럼 취급되는 노예나 다름없었다】을 몰수해, 전 국토와 백성을 천황이 지배하는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행정 기구를 갖추고 전국을 국(國), 군(郡), 리(里)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조세제도도 중국을 본떠 조용조(租庸調)【조(租, 토지에 매기는 세금, 즉 농작물), 용(庸, 사람에 매기는 세금, 즉 부역), 조(調, 비단이나 베 같은 옷감 또는 지역 특산물】라는 단일한 제도로 묶었으며, 원활한 세수 집행을 위해 호적을 만들었다.
속미지정 粟米之征 |
조(租) | 곡식 전조(田租) |
력역지정 力役之征 |
용(庸) | 노동력 요역(徭役) |
포루지정 布縷之征 |
조(調) | 특산물 공물(貢物) |
중앙집권 체제와 행정제도, 조세제도를 갖추었다면 명실상부한 국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이카 개신으로 일본은 비로소 고대 국가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667년 나카노 오에는 수도를 아스카(飛鳥)에서 오쓰(大津)로 옮기고 이듬해에는 천황에 올라 덴지(天智)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나라든 개국 초기에는 정권이 불안정한 법이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669년 개혁의 일등공신인 가마코가 사망하고, 2년 뒤 덴지마저 죽자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두 인물이 사라졌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과 이후 정세마저도 쇼토쿠 태자-소가 우마코 페어를 재현한 셈이다.
덴지가 죽자 계승권자인 아들 오토모(大友)와 덴지의 동생인 오아마(大海)는 조카-삼촌 관계가 무색하게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다툼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걸친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내전은 한반도와 연관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에 의해 삼국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일본의 조정에는 백제계 유민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반대 세력인 오아마에게는 신라계 도래인들이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일본 땅에서 다시 대결한 셈인데, 결과는 한반도에서처럼 신라계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오아마가 덴무(天武, 631~686) 천황으로 즉위했다. 임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 역사에는 이 사건을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부른다(훗날에는 역사적 사건의 명칭에 일본의 연호가 들어가지만, 이 무렵에는 아직 연호가 일반화되지 않은 듯하다).
정권을 잡은 덴무는 잠시 내전으로 중단된 개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시급한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하고, 지배 세력의 이념적 안정을 위해 불교를 중흥시켰다. 특히 덴무는 천신만고 끝에 천황 위에 오른 탓인지, 천황의 존엄성을 새삼 과시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천황으로 있는 14년 동안 신하를 두지 않고 만사를 독재로 일관해 신적인 권위를 확립했다.
신라계의 도움으로 승리했으므로 당연히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덴무는 한반도에 통일 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경험을 열심히 배워 새로운 율령도 반포했다. 이 율령을 모델로 삼아 701년에는 다이호 율령(大寶律令)이 제정됨으로써 일본은 명실상부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일본이라는 오늘날의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우리는 지금까지 편의상으로 일본이라는 명칭을 써왔다). 그 이전까지는 야마토라는 국호를 계속 쓰면서 한자 표기로는 ‘왜(倭)’, ‘대화(大和)’라고 했는데, 이제는 ‘해가 뜨는 곳’ 일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대화(大和)에서 나온 화(和)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화식(和食)은 일본의 전통 음식을 가리킨다】. 일본이라는 국호를 새로 제정한 이유는 야마토 정권처럼 한 지역에 국한된 국가가 아닌 전국적인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지만(물론 오늘날과 같은 일본 전체를 말하는 건 아니고 간토 지방까지만을 말한다), 당시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倭)’라는 경멸적인 이름을 사용한 데 대한 반발도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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