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劉淵)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ㆍ연(燕)ㆍ진(秦)ㆍ진(晋) 등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夏)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前)ㆍ후(後)ㆍ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 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을 지향했다. 100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가 쟁패하는 난립상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통일의 기운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일단 전진(前秦)이 잠시 중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세를 몰아 동진마저 통일하려던 전진은 비수(淝水)라는 곳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당한다. 그러자 전진의 휘하에 있던 부족들이 독립하면서 한꺼번에 일곱 나라가 생겨난다. 분열기에서도 가장 격심한 분열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후 약 50여 년간 분열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439년 선비족의 척발(拓跋)씨가 세운 북위가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합했다.
드디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조는 아니라 해도 남중국과 북중국에 각기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이때부터 약 150년 동안 중국은 중원의 북위와 강남의 송이 공존하는 남북조(南北朝)시대를 겪게 된다. 하지만 북부와 남부가 내내 완벽한 통일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화북에서는 북위ㆍ동위ㆍ서위ㆍ북제(北齊)ㆍ북주(北周)의 다섯 나라, 강남에서는 송ㆍ제(齊)ㆍ양(梁)ㆍ진(陳)의 네 나라가 교대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예전의 극심한 분열기에 비해 안정된 바탕에서 역사가 전개되고 시대적 성격도 비슷하기 때문에 한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중국 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린 만큼 남북조시대에는 두 역사가 어느 정도 별개로 진행된다. 개략적으로 보면 북조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중요하고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한화(漢化), 즉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리력에서만 앞설 뿐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배층은 중원을 차지한 참에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사회에 합류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중원에 입성하자 곧바로 부족제를 포기하고 유목민 부락을 해산한 것은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은 손에 쥐더라도 관료 행정에는 한족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민족 정권들은 한족 출신의 명문가를 정치와 행정에 참여시켜, 각종 관료제와 율령을 맡기고 조세 정책을 입안하게 했다. 특히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는 도읍을 한족 왕조들의 전통적인 수도인 뤄양으로 옮기고, 자기 성마저 중국식의 원(元)씨로 바꾸었다. 나아가 그는 복식과 제도, 의식, 풍습 등도 중국식으로 개혁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한화 정책은 이후 북조의 다른 나라들에도 이어졌으며,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몽골족 정권(원)과 만주족 정권(청)으로 계승된다.
효문제가 한족 관료들을 시켜 만들게 한 정책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균전제(均田制)다. 485년에 한족 관료인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처음 시행된 균전제는 사실상 최초의 토지제도였다. 예전에도 토지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거의 다 제도라기보다는 원시적 관행에 가까웠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토지만이 아니라 농민들까지도 제후들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처음으로 도시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영토적 개념의 국가를 형성한 진 한 시대에는 미개간지도 워낙 많았고 토지의 소유 관계가 확고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중요했던 것은 토지보다 토지 생산물의 소유 여부였으므로 토지제도보다 지방 호족들에 의한 소작제도가 발달했다. 그러다 삼국시대에 들어 중국의 영토는 처음으로 ‘꽉 찬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앞서 본 것처럼 위나라의 조조는 후한 시대의 소작제도를 이용해 국가가 토지를 직접 운영하는 방식의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했다. 그 이후 여러 왕조는 위의 둔전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둔전제는 원래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를 사용하는 제도였다. 다만 지방 호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건드리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영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위나라와 달리 화북의 통일 제국인 북위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국가 수입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둔전제를 보완하고 세분화해 균전제(均田制)를 만들었다.
균전제(均田制)는 토지 국유와 급전(給田)을 기본 개념으로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국가가 토지를 농민들에게 지급하고 경작시켜 일정한 비율의 세금을 받는 방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제도지만 원래 제도란 처음 고안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후들, 진ㆍ한 시대의 호족들을 토지 소유자로 당연시했던 당시로서는 국가가 토지의 주인이라는 발상은 무척 획기적이었다. 균전제를 시행하게 되자 국가는 단기적으로 전란 때문에 유민이 된 농민들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균전제는 이후 들어설 수ㆍ당 같은 통일 제국에 전승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 윈강 석굴의 내부 ‘오랑캐’ 선비족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북위의 문화 수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당시 북방 민족들은 사실상 중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북위 시대에 건축된 윈강(雲岡) 석굴의 불상들을 보면 당시 예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기 1000년 전에 동양에서는 이런 웅장한 ‘천장 조각’이 제작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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